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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y 12. 2023

결혼 선배가 꼭 챙기라던 두 가지


결혼을 앞두고 먼저 결혼한 선배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결혼할 때 이거 두 가지는 꼭 챙겨라!

1. 명품백, 결혼하면 사기 힘드니 예물로 챙겨라.

2. 비상금, 남편 모르게 돈 필요한 날이 올 테니 챙겨라.



결혼 전에 명품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샤넬백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당당한 느낌, 내가 꿈꾸는 내 모습이 샤넬이었다. 샤넬풍의 트위드재킷과 진주 목걸이를 즐겨 착용했는데 가방만큼은 비슷한 풍이 아닌 진짜 샤넬을 들고 싶었다. 결혼 예물 값으로 받은 돈으로 귀금속 세트 대신 클래식한 느낌의 샤넬 숄더백을 사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결혼 예물을 사기 전에 형님(남편의 누나)이 나를 불러 말했다.

"내가 화장품 하고 명품백 하나 사줄게. 골라놔."

사업이 잘 된다고 큰소리치던 형님이니 분명 샤넬백을 사줄 거라 믿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예복과 귀금속 세트를 샀다.


형님은 결혼식 전에 화장품을 사주고는 가방은 차일피일 미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셔만 둘 귀금속은 안 샀을 거라고(그 귀금속은 몇 년 뒤 몽땅 도둑맞았다) 원망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약속을 지키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결혼을 하고 두세 달 지났나, 형님은 사업을 부도내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샤넬백 몇 십 개 사고도 남을 빚더미를 부모님께 떠넘기고.




결혼 당시 내게는 결혼 전에 모은 비상금 천만 원이 있었다. 형님의 빚을 갚는데 보태라고 내놓을까 망설이다 내놓지 않았다.  돈은 예금통장에 뒀다가 중국 펀드에 투자했다.


결혼 선배의 조언에 따라 남편 몰래 적금을 하나 들었다. 1년 뒤에 만기가 돼 500만 원이 생겼는데 내 주머니에 넣을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가 형님 때문에 이자  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리신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자기야, 사실은 말이야. 내가 적금을 는데 이거 어머니 드리자."


중국 펀드는 계속 마이너스였다. 20% 정도 손실을 보고 돈을 찾았을 때 샤넬백을 살까 잠깐 고민했다. 당시 나는 아이들이 어렸기에 기저귀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당장 들지 못할 가방을 거금 주고 사기가 망설여져 일단 돈을 은행넣고 거기에 조금씩 더 넣어 다시 천만 원을 만들었다.


몇 년 뒤, 남편이 지인 사업에 약간의 투자를 하고 싶어 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투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기야, 사실은 말이야. 나한테 천만 원이 있어. 잘되면 갚아라."

나는 샤넬백 대신 투자를 했고, 그 사업은 망했다.


얼마 뒤에 친정엄마가 어떤(말하자면 복잡한) 명목으로 천만 원을 줬다. 그 돈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지인들과 법인을 설립하고자 했고, 가진 돈이 부족했다.

"자기야, 사실은 말이야. 엄마가 천만 원 줬어. 이거 보태서 해 봐."

이건 아직 망하지는 않았다. 


통장에 나만 아는 돈이 있다는 건 왠지 모를 든든함이 있다. 이번에는 절대 남편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장기 보험적금 상품을 하나 가입했다. 20만 원씩 10년 정도 부어서 2천만 원이 넘었다.


남편이 노후대비로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 남편이 사는 주식은 크게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으며 분기마다 배당금이 나오는 주식이었다. 수익률을 따져봤을 때 내가 가입하고 있는 보험적금 상품보다 훨씬 괜찮았다. 고민 끝에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사실은 말이야. 나한테 돈이 2천5백만 원이 있어. 이것도 주식 살까?"



작년에 직장 내에서 소속이 바뀌며 퇴직금을 중간정산받게 되어 600만 원이 생겼다. 이번에는 돈이 생긴 걸 숨기지 않고 남편에게 했다. 편 몰래 비상금을 챙겨 쓸 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슬픈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 퇴직금 받았는데 이걸로 뭐 하지?"

"자기 쓰고 싶은데 써. 샤넬백 하나 사던지."

"자기야, 600만 원으로 샤넬백 못 사. 그리고 내가 샤넬 들고 다니면 다들 짝퉁인 줄 알 거야."

결국 그 으로 채권을 샀다.



"자기야, 나 몰래 또 적금 들어놓은 거 없어? 채권 좀 더 사면 좋겠는데."

남편은 이제 내가 늘 돈을 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기야, 사실은 말이야. 나한테 마이너스 천만 원이 있어. 대출받아서 샤넬백 샀거든."

정신 차려보니 이건 꿈이다.




결혼 18년, 나는 명품백도 비상금도 챙기지 못했다. 이 두 가지를 꼭 챙기라던 결혼 선배는 비상금을 잘 챙겨 명품백을 사는지 가끔 만날 때마다 새로운 백을 들고 나온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꾸미는 것(명품, 성형, 인테리어)과 강아지다. 가족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인다. 내게 말한 두 가지를 챙기느라 가족관계는 챙기지 못했나 보다.


솔직히 나는 그녀의 명품백이 부럽다. 그녀를 만나고 오면 명품 쇼핑몰을 뒤져 마음에 드는 가방 몇 개를 장바구니에 담아두곤 한다. 샤넬 보다 저렴한 가방이라도 하나 살까 하는 마음으로 적금을 들었다. 세 아이들이 커가니 돈 나가는 단위가 커져 한 달에 10만 원 적금통장에 넣는 것도 벅찼다. 3월에 1년 만기가 됐고, 이제는 적금을 들기 힘들 것 같다.


적금 탄 돈으로 가장 먼저 한 건 좋아하는 가수가 출연하는 뮤지컬 VIP석 티켓 구입. 그리고 남은 돈 백만 원, 나는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몇 가지 명품백을 고민만 하고 선뜻 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니가 갑자기 여행 제안을 했고 적금 탄 돈 백만 원으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바로 오케이를 했다. 지금 내게 명품백이 없는 건 명품백을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사는 거다, 명품백.



어버이날 나를 기쁘게 해 주겠다고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내가 한 땀 한 땀 공들여 예쁘게 만들어야 할 명품백이 저기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명품백이 내 손을 떠날 때쯤 남편이 가져간 비상금도 되돌려 받을 수 있겠지. 그때까지 내 로망 샤넬백은 장바구니에만 담아두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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