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지9년이 지났다. 늘어진 뱃살을 들어 올려 출산의 흔적을 들여다본다. 17년 전 첫수술 후에는 관리를 제대로 못해 지렁이를 연상케 하는 켈로이드 흉터가 남았었다. 2년 뒤두 번째 수술로 지렁이를 떼어낼 기회를 얻었다. 연고를 꼼꼼히 바르는 등 신경을 썼더니뾰족한 송곳에 피부를 살짝 긁힌 듯한 하얀 실선만 남았다. 이대로 끝일 줄 알았으나 몇 년 뒤 세 번째 수술을 하게 됐다. 같은 자리를 세 번 잘라내고 당겨 꿰매니 피부가 살짝 안쪽으로 말려들어가고 만져보면 다른 부위와 달리 감각이 무디게 느껴진다. 최종적으로 내 배에는 연한 갈색의 선이 남아있고 그 부분에서 살이 접혀 덮여있어 위에서 내려다보면 수술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제왕절개는 정확히 말하면 배를 가른다기보다는 더 아래쪽 치골 사이를 가른다. 비키니를 입어도 보이지 않을 위치인데비키니를 입을 일은 만들지 못했다.
첫째를 낳을 때, 저녁식사 후진통이 시작돼 병원을 갔다. 보통 첫 아이 출산 시 너무 일찍 병원을 가 다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하여 최대한 참다가 갔다. 간호사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했다. 아이가 두 시간 내로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난 별로 안 아팠는데, 나 되게 수월하게 낳으려나 봐' 기대하며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당시 인기였던 드라마 '주몽'을 보다가 진통을 견디다가 진통이 사라지면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간호사는 계속 두 시간 뒤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저녁 먹은 걸 다 토하고 분만촉진제를 맞고 처음 보는 의사가 와서 양수를 터트리고 제대로 힘주라고 혼나고 뭔가 분주하고 믿음이 안 가는 상황들이 이어지다가 아침이 됐다.
"저 그냥 수술해 주세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나는 이 한마디를 외쳤고 남편은 '좀 더 애써보지. 자연분만이 좋다던데'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씁쓸한 표정으로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덜덜 떨었다. 가운의 앞 단추가 다 풀어진 채 누워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고 나도 부끄럽다기보다는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았다. 마취에서 깨어나 처음 본 아이의 얼굴이 빨갛고 머리끝이 뾰족했다. 나올 준비를 하느라 그랬나, 고구마 같았다.
둘째 때는 브이백(첫째를 제왕절개 한 산모가 둘째 때 자연분만 하는 것)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학관에 가서 좋은 날을 받았다. 부분마취를 해서 아이가 나오자마자 안아볼 수 있었다. 아이를 이렇게 편하게 낳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아이도 편하게 나와서 그런지 뽀얗고 예뻤다.
막내를 낳을 수술날짜를 5월 1일로 잡았다. 기억하기 쉽고 나중에 직장을 다닌다면 생일이 휴일이라 좋을 것 같았다. 다니던 병원에서는 노동절이라도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술을 며칠 앞두고 아이의 심장에 이상이 생겨 갑자기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됐다. 대학병원은 노동절에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막내딸의 생일은 5월 2일이 됐다.심장 이상으로 큰 걱정을 안고 태어난 막내딸은 지금은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열 살 생일을 맞았다.
막내를 낳을 때 나는 내 엄마뻘 정도의 담당 의사에게 한 가지 시술을 권유받았다. 그분이 우리 부부를 보며 물었다.
"또 낳을 거야?"
"아뇨"
"그럼 묶지 그래?"
"남편(정관수술) 시키려고요."
"배 짼 김에 묶어버려. 뭐 하러 남편을 시켜?"
"그게 한 번에 되는 거였어요? 그럼 그게 낫겠네요."
"하하하"
내 웃음은 씁쓸했지만 남편의 웃음은 유쾌했다. 둘째 출산 후 남편에게 정관수술을 권했지만 남편은 무섭다며 미루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겁 많은 남편을 구원한 것이다. 결국 나는 세 번째 제왕절개와 난관을 묶는 시술을 함께 받았다.
"엄마 뱃살 좀 빼야겠다."
언제는 슬라임 같아서 좋다더니 이제는 뱃살을 빼라는 막내딸에게 말했다.
"이거 살 아냐. 그냥 껍질이야. 너 풍선 크게 불었다 바람 빼 본 적 있지? 바람 빠지면 원래 크기로 작아져?"
"아니"
"엄마 배는 풍선처럼 커졌다 작아졌다를 세 번이나 반복했어. 그래서 피부가 원래대로 작아지지 않은 거지 살찐 게 아니라고."
"에이,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다. 대책 없이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살다 보면 매 순간이 두려움이고 돌아서면 외로움이고 그렇단다.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달콤한 것들을 찾았지. 넌 이해 못 하겠지만 예를 들면 맥주 같은 것들.
5월 2일, 오늘은 막내딸의 생일이다. 뱃살을 들어 올려 이 예쁜 아이가 내 안에서 나왔다는 증거를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정말 고생했어, 내 자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