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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29. 2022

너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나이 마흔에도 임신이 되는 거였어? 신이시여... 도대체 왜 지금 내게?'

몸상태가 약간 이상해 혹시나 싶어 해 본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나왔다. 잠깐 동안 이게 현실이 맞는 건가, 꿈인가 의심도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과는 사소한 다툼 이후 며칠째 냉전 상태였다. 아무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나는 그 어렵다는(?) 피부미용사 자격증 시험을 인터넷 동영상만 보고 단번에 합격했다. 아이들도 이제 어느 정도 컸으니 나도 다시 일을 해 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틀 뒤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면서 맥주와 화장품을 사들고 들어왔다. 내 눈치가 보여 집에 못 들어오고 밖에서 혼자 저녁을 먹다가 화장품 가게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남편이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자기야, 이 화장품 정말 좋은 거래. 자기 생각나서 샀어. 맥주 마시고 기분 풀어~

-안 마셔.

-아이~왜 그래~ 마시자~

-나 이제 술 못 마셔.

-왜~? 이제 나랑 술 마시기 싫다는 거야?

-싫은 게 아니라 못 마신다고! 지금껏 내가 술 거부한 적 있었어? 못 마신 게 언제였어? 잘 생각해 봐!

-뭐.....? 설마...??

남편 앞에 두 줄이 표시된 임신테스트기를 내밀었다. 남편이 벌떡 일어섰다.


남편이 일곱 살, 다섯 살 두 아이가 잠들어있는 방문을 열었다.

-얘들아, 지금 잠잘 때가 아니야. 빨리 일어나. 우리 파티해야 돼. 니들 동생 생긴대~

자다 깬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아빠가 신나 하니까 덩달아 신났다. 얼마 전에 아이들이 동생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신나 하는 세 사람 사이에서 나만 떨떠름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내게는 나랑 딱 마흔 살 나이차가 나는 막내딸이 생겼고, 벌써 그 아이가 아홉 살이다.




지난주 목요일, 막내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이었다. 금요일도 재량휴업일로 등교를 하지 않았다. 회사에 목요일에 반차, 금요일에 연차를 내고 막내딸과 놀기로 했다. 이번 이틀 휴일은 너를 위해 존재하는 엄마가 되겠어. 지윤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딸에게 어디 가고 싶냐고 물으니 아쿠아리움을 가고 싶다고 한다. 목요일 아침에 김밥 도시락을 싸서 막내를 학교 돌봄 교실에 보내 놓고 출근했다. 학교에서 도시락 먹고 피아노 학원까지 다녀와서 2시에 롯데월드 아쿠아리움으로 출발했다. 딸이 좋아하는 친구 한 명도 함께 데리고 갔다.


아쿠아리움에서 사진을 많이 찍어주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협조를 안 해준다. 각자 폰으로 사진 찍기 바쁘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물고기 감상을 즐겼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살고 있다니, 새삼 놀랍다. 아쿠아리움에서 나와 롯데타워 앞 광장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트리 장식 앞에서 한참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지윤아, 우리 내일은 원마운트 워터파크 가자.

-어 좋아. 그런데 오늘처럼 오후에 가자.

-왜? 일찍 가야 많이 놀지.

-나 돌봄 교실에서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어. 돌봄 교실 갔다가 워터파크 가고 싶어.

이런, 이젠 친구가 더 중요한 나이가 됐구나!

-알았어. 오후에 가면 너무 늦고 11시에 출발하자.


워터파크는 평일인 데다가 실내만 개장해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파도풀, 유수풀을 번갈아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사실 딸 보다 내가 더 신났다. 슬라이드가 무서워 안 타겠다는 딸에게 말했다.

-엄마 슬라이드 타고 싶어. 같이 타자. 한 번만 타자~

-그래...

2인용 튜브를 짊어지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이 끝없이 나타났다. 9층 정도 높이였다. 내려올 때는 정말 잠깐이었다. 소리 몇 번 지르니 끝~! 생각보다 안 무섭다는 걸 확인한 딸이 말했다.

-엄마, 한번 더 탈까?

-그래...

2인용 튜브를 짊어지고 다시 9층 높이 계단을 올라갔다. 튜브를 타고 빠르게 내려왔다.

-엄마, 한 번 더 탈까?

2인용 튜브를 짊어지고 9층 높이 계단을 느리게 올라갔다...


한참 놀다가 오후 네시쯤 딸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놀고 소고기 먹으러 갈까?

-그래. 우리 마지막으로 슬라이드 한 번 더 타자~!

아까보다 더 무거워진 2인용 튜브를 짊어지고 9층 높이 계단을 네 번째 오르며, 마치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된 기분이었다. 괜찮아... 난 오늘 널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니까.


딸의 웃는 모습을 오래도록 두 눈에 담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딸에게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막내딸이 있어서 나는 더 많이 웃고, 더 젊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막내딸은 가끔 내가 힘이 없어 보이면 다가와 나를 웃게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지윤이 없었으면 아주 큰일 날 뻔했지 뭐야.

내게 막내딸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그럼, 남편과 첫째, 둘째는?

신은 내게 선물을 참 많이도 주셨다!


<막내딸의 질문에서 시작된 나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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