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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pr 28. 2023

밤늦게 들어온 사춘기 딸의 반성문


  얼마 전에 중3 둘째 딸이 저녁 여덟 시가 다 돼가는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카톡을 보냈다. 한참 후에 친구들과 한강 공원에 있다고 답이 왔다. 당장 들어오라고 했지만 밥을 아직 안 먹었으니 먹고 오겠다고 했다. 전화를 받지 않은 것에 1차 화가 났고, '허락'이 아닌 '통보'라는 것에 2차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사준 가장 큰 이유는 연락이었다. 그런데 정작 연락이 필요한 순간에 아이들은 전화를 잘 받지 않아 속이 타게 만든다. 카톡은 보는데 전화는 안 받는 이유가 뭘까? 엄마 전화는 따로 걸러버리는 앱이 아이들 폰에 심어져 있기라도 한 걸까.


  아홉 시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냐며 반갑게 나가보니, 남편이다. 평균 퇴근 시간 열 시 삼십 분인 남편이 그날따라 일찍 들어왔다. 딸이 늦은 시간까지 한강공원에 있다는 것을 듣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딸은 얼마 전에도 방을 거의 쓰레기장 수준으로 어질러놓고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서 남편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 딸에게 카톡을 보내 아빠가 매우 화가 나 있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했다.


  열 시가 조금 넘어 딸이 들어왔다. 한바탕 난리가 날지 모른다는 내 불안감과는 달리 딸은 태평한 얼굴이었다. 다행히 남편은 피곤했는지 아이를 크게 혼내지 않고 반성문을 열 장 쓰고 자라고 했다.

  "지금 반성문 열 장을 어떻게 써?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쓰라고 해."

  솔직히 아이가 걱정됐다기보다 내가 쉬고 싶어 말려봤지만, 남편은 완강했다.

  "쓰고 자."


  나는 아이들을 되도록 혼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건 우리 부부의 합의에 의한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이 말하길, 부모가 둘 다 아이에게 엄격하면 나중에 아이가 힘들 때 기댈 곳이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악역은 본인이 할 테니 나는 언제든 아이를 받아줄 수 있는 따뜻한 엄마가 되라는 예쁜 말을 했다. 가끔은, 아니 자주 나는 짜증과 잔소리를 아이들에게 쏟아내곤 하지만 심하게 혼내지는 않는다. 혼낼 일이 있으면 남편한테 미룬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내 말을 잘 안 듣는다.



  딸이 말없이 A4용지 열 장을 꺼내와 식탁에서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밤 열두 시쯤 다 썼다고 들고 왔다. 남편은 이미 코를 골고 자고 있었다.


  "빨리 썼네... 푸하하하."

  A4용지 열 장을 가득 메운 한 문장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 늦게 들어온 것을 반성합니다

집에 늦게 들어온 것을 반성합니다

집에 늦게 들어온 것을 반성합니다


이건 첫 장이고 뒤로 갈수록 글씨가 엄청 커진다


  "그래, 넌 늦게 들어온 것 말고는 잘못한 게 없다는 거네? 됐다. 가서 자."

글씨는 뒤로 갈수록 점점 커졌지만 어쨌든 열 장은 채운 거니 더 말할 게 없었다.


  

  주변에서 딸에게 사춘기 증상, 그 무섭다는 중2병 증상이 보였는지를 묻곤 한다. 내가 느끼는 달라진 모습은 방문을 닫아달라고 하는 것, 방을 엄청나게 어질러놓고 내가 아무리 잔소리해도 꿈쩍 안 하는 것, 자신이 깜깜할 때 돌아다녀도 될 만큼 컸다고 생각하는 것, 날마다 맛있는 걸 해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없다.


  난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성격은 타고나는 부분이 크다는 걸 느낀다. 신생아 때 두 시간 이상 자는 법이 없던 첫째는 아직도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이다. 둘째 딸은 첫째와 달리 신생아 때부터 저녁에 잠들면 아침까지 깨지 않았다. 잠에서 깨도 울지 않고 혼자 방실방실 웃으며 놀고 있어서 별명이 '방실이'였다. 그때 모습 그대로 지금도 굉장히 낙천적이고 여유롭다. 예민한 첫째를 돌보느라 순한 둘째는 많이 방치해 뒀다. 딸이 쓴 반성문을 보면서 나도 반성한다.


방실이를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방실이를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방실이를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방실아."

  다음 날, 등교하는 딸을 현관 앞에서 불러 꼭 안아줬다.

  "사랑해."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딸을 보내고 딸의 방문을 열었다. 이런, 열지 말았어야 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저기 벗어던진 옷들과 수업 프린트물, 마시다 만 음료병, 드라이기, 머리카락 뭉치들이 굴러다닌다. 조금 전 교복을 끔하게 차려입고 나간 우윳빛깔 피부의 여자애 방이 이렇다니... 천천히 방을 정리하다 보니 딸이 어제 잘 들어왔으니까 이런 흔적도 남은 거지, 아이가 날마다 무사히 집으로 들어오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어쩌면 참 고마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라도 집에 잘 들어와 줘서 고마워

늦게라도 집에 잘 들어와 줘서 고마워

늦게라도 집에 잘 들어와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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