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람 Jan 07. 2023

차라리 아무 말하지 말자

 

-엄마, 저 성적 올랐어요~

-그래? 잘했어~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아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몇 마디 칭찬을 해주고 전화를 끊고는 한 달 전의 일이 생각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이 기말고사를 보기 일주일 전 일이다. 아들에게 카드를 건네주며 저녁에 학원비를 결제하라고 했다. 그런데 낮 열두 시쯤에 카드 사용 알림 문자가 와 있었다. 카드 사용처는 병원과 약국이었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집이요.

-왜?

-머리가 아파서 보건실 갔더니 체온이 너무 높다고 병원 가라고 해서 병원 가서 코로나 검사했는데 음성이에요.

-왜 엄마한테 전화 안 했어?

-하려고 했어요.

난 순간 걱정보다는 화가 났다. 전화를 안 한 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건 아닐까. 아들이 지난 중간고사 전에도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며 조퇴를 하게 해달라고 했었다. 기말고사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 또 이런 일이 생기니 일부러 이러나 싶었다.

-너 시험기간에 이러는 거 처음 아닌 거 알지? 새벽에 일어나서 축구 본다고 앉아있더니, 컨디션 조절을 그렇게밖에 못해?

-죄송합니다.

아들의 풀 죽은 목소리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성적 올리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공부가 하기 싫으니 어쩌지? 몸이 아파서 못한 걸로 하자!' 아이가 그런 마음으로 꾀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퇴근하고 집에 가보니 아들은 학원을 가고 없었다. 잠시 후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을 마주하고 보니 화낸 게 미안했다. 엄마한테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알아서 병원을 가고 약을 사다 먹는 아이한테 칭찬은 못해줄 망정 짜증을 낸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에 아들은 열이 더 많이 났다. 이번에도 아들은 혼자 병원을 가서 독감검사를 했다. 독감은 음성인데 배가 아프다고 했다. 장염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들은 괜찮아졌는데 딸이 열이 나고 배가 아프다고 했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기말고사 마지막날인데 앉아있기도 힘들고 글씨 읽기도 힘들다며 말했다.

-엄마 나 학교 안 가면 안 돼?

-시험은? 공부 열심히 했잖아

-중간고사 보다 못 볼 것 같아. 아파서 못 보면 중간고사 성적 나온단 말이야.

-성적 더 안 나와도 되니까 가서 시험 봐.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딸을 불렀다.

-많이 안 좋아?

-응

-일단 학교 가. 죽어도 학교 가서 죽어.

헉-!

딸이 삐져서 나갔다. 나도 남편의 말에 화가 났지만 그냥 나왔다. 죽어도 학교 가서 죽어, 정신력으로 버텨! 나도 어릴 때 어른들한테 많이 들었던 말이다.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어릴 때 머리가 너무 아파서 엄마한테 말했더니 엄마가 '괜찮아. 안 죽어.'라고 말해서 너무나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엄마한테 들었던 차가운 말들이 내 몸속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꽃에 물을 주듯 아이들에게 좋은 말만 해주고 싶지만 잘 안될 때가 많다.


<학생들이 부모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 TOP10-서울시 교육청 자료>

1위 - 우리 딸/아들 정말 잘했어

2위 - 항상 사랑한다

3위 - 넌 지금도 잘하고 있어

4위 - 오늘도 수고 많았어

5위 - 괜찮아 다 잘될 거야

6위 - 태어나줘서 고마워

7위 -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8위 - 우리 같이 놀러 가자

9위 - 넌 최고의 선물이야

10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부모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이라는 제목으로 검색을 해보니 이런 말들이 나왔다. 생각났다. 나도 어릴 때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이 '잘했어'였고, 그 말은 나를 더욱 잘하고 싶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이 말들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중얼중얼 소리 내어 연습했다.


-얘들아, 엄마 왔어~

딸의 방문을 열었다. 방바닥에 온갖 물건들이 쓰레기와 함께 굴러다니는 데 딸은 태연하게 휴대폰을 보고 누워있었다. 가슴속에서 뭔가 훅 올라와 아까 연습했던 그 말들을 어디론가 흩날려 버렸다.

'딸아, 도대체 얼마나 더 얘기해야 해? 방 정리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공부는 해서 뭐 하게? 너 앞으로 뭐 될래?' 마음속에서 올라온 이 말들 대신 딸을 보며 한숨을 한번 쉬고 말했다.

-배 고프지? 금방 밥 차릴게~


밥을 차리며 생각했다. 나는 늘 칭찬은 짧게 하고 화는 길게 냈다. 눈앞에 아이의 잘못된 행동이 보이면 화가 났고, 뭔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상처가 되는 말들도 서슴지 않고 해댔다. 그런 말들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기분 좋을 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보다 화 나는 순간에 화를 내지 않는 게 더 아이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날 때 일단은 멈추자. 아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연습하기 이전에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화가 날 땐 차라리 아무 말하지 말자.


다음날 오후에 딸에게 전화가 왔다.

- 엄마, 오늘 내 방 들어오면 깜짝 놀랄 거야.

-청소했구나. 정말 잘했어. 사랑해~

드디어 연습한 말한 번 써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딸의 방은 또다시 쓰레기장...

휴, 아무 말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10년 전에 내가 한 짓을 마주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