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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r 24. 2023

피라미드 꼭대기로 나를 초대해 준 친구


  "떠나가면 눈물을 짓고 돌아오면 미소를 짓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수많은 얼굴~♪ 정거장~~ 그것은 너와 나의 인생이 있는 곳~~~♬"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은 어느 강연장, 진행자가 물었다. 나와서 노래 한 곡 하실 분? 모두가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내가 중학교시절 좋아했던 가수 이상은을 닮은 여자가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부른 곡은 '정거장'(김수희 곡),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몸동작으로 모두를 사로잡은 그녀 덕분에 강연장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단체로 모여 앉아 들은 강연이 끝나고 소그룹으로 나눠 작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지금 얼마를 버는데 얼마나 쉽게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들이 팔고 있는 옥장판은 단돈 800만 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사람만 데려오면 그 사람들이 또 세 사람을 데려오고 계속 그렇게 이어지면서 난 회사의 최고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글로벌 네트워크 그룹이라고 말했지만 그래, 여기는 말로만 듣던 피라미드 회사가 분명해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미없는 회사에 취업한 지 일 년쯤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다급하게 30만 원을 빌려가고는 연락이 없던 예서한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1박 2일 강원도로 여행을 가는데 가족이나 친구를 데려가야 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예서는 고등학교 친구로 매우 밝고 명랑해 같이 있으면 즐거운 아이였다. 그런 친구를 따라나선 길이 피라미드였다는 것에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다.


  "예서야, 여기 피라미드잖아. 너 어떻게 나를 속일 수가 있어? 나 갈래. 내 신분증 줘."

  회사로 가는 길에 신분 확인을 위해 제출해야 한다며 예서가 내 신분증을 가져갔었다.

  "속인 거 아냐. 강원도 여행 진짜 가는 거야. 그리고 신분증은 사무실에 있어."

  사무실에 가 보니 조폭 같은 남자들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신분증을 달라고 하자 위협적인 말투로 나를 약 올렸다. 호락호락 신분증을 내줄 것 같지 않았다.

  "좋아, 내가 이거 1박 2일 동안 다 듣고도 아니라고 하면 너도 같이 나오는 거야."

  "그래. 알았어."


  강의가 끝난 후 몇 대의 관광버스에 나누어 탔다. 관광버스에는 내 또래, 혹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강원도로 가는 긴 시간 동안 여느 여행 가는 단체처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놀았다. 나만 빼고 다들 신나 보였다.


   연수원 느낌의 커다란 숙소에 도착하자 친구가 속한 그룹의 사람들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다정한 언니, 든든한 오빠처럼 다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들 중 누구도 순탄한 삶이 없었으나 이곳에서 인생이 달라졌다 말했다. 그리고 교묘하게 내가 잘못 살고 있다 말했다. 

"써니 씨, 지금까지 살면서 써니 씨를 믿고 따라와 줄 친구 세명도 못 만들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싸우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예서 내가 이 일을 의심하는 게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거라며 섭섭하다 말했다.


  새벽 두세 시쯤 됐을까, 나는 숙소 앞마당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내 인생을 돌아봤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설득당한 나는 그동안 잘못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이 사람들과 함께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는 달콤한 꿈을 꾸기로 결심했다.


  "예서야, 나 회사 그만둔다고 말하고 올게."




  그곳에 다녀와서 회사에 출근한 첫날, 마음과는 달리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일 해야지, 내일 해야지 미루다 보니 강원도에서의 확신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현실적인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옥장판 값 800만 원을 어떻게 마련하지? 카드? 그럼 그 카드값은? 거기서 데려 오라고 한 세 사람, 누굴 데려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데려갈 만한 친구가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데려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 보면 그게 옳지 않은 길이라는 걸 난 알고 있었다. 혼자 끙끙 앓다가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나 고민이 생겼어."

"그래, 너 여행 갔다 오고 나서 좀 이상하더라. 무슨 일 있었지?"

"응, 사실 친구네 회사에서 회사 그만두고 오라는데, 사람을 세 명 데려 오래."

"야, 거기 피라미드잖아. 다 사기꾼들이야. 절대 가면 안돼."


예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난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써니,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거야?"

"예서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너도 나와."

"넌 친구도 아냐.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

예서는 내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고, 그렇게 그 친구와 멀어졌다.




  일 년쯤 후, 화창한 봄날이었다. 강남으로 전시회 구경을 가자는 중학교 친구 혜나의 말에 한껏 멋을 부리고 곳은 전시회장으로 보이지 않는 어느 건물 앞이었다. 그 건물 앞에서 전에 예서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혜나... 하, 정말 뚜껑 열렸다.

"혜나야, 여기 피라미드잖아. 나 전에도 한번 가봤어. 네가 어떻게 날 속일 수가 있어?"

친한 친구에게 두 번이나 속은 게 너무나 화가 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신분증을 건네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발걸음을 돌리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혜나는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라는 지령을 받기라도 한 듯 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번 들어만 봐 달라는 혜나간곡한 부탁에 결국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듣고 나서 내가 아니라고 하면 같이 나가자는 조건이었다. 매우 성실하게 강의를 들은 후 혜나에게 나가자고 했다. 포기 못하고 나를 계속 설득하려는 혜나와 길바닥에서 싸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혜나가 너무 걱정돼서 일 년 만에 예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내느냐는 내 말에 예서왜 전화했냐 되물었다. 아직도 내게 화가 나 있는 듯 한 목소리였다. 바로 용건을 말했다.

"사실 친구가 피라미드 회사에 들어갔는데 너무 걱정돼서 말이야. 넌 그거 잘하고 있어?"

"나 거기 그만뒀어. 하지만 난 거기 갔던 거 후회하지 않아. 거기서 배운 게 많거든. 그 친구 본인이 원하면 그냥 하게 놔둬."

예서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마치 내가 협조를 안 해줘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못 올라 간 듯, 그래서 내가 진짜 친구가 아니란 걸 알게 됐다는 듯 들렸다. 그동안 우리가 쌓아 올린 우정은 그녀의 피라미드가 무너짐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 듯했다.



  다행히 피라미드 입문 초기였던 혜나 빨리 정신을 차렸고, 자신이 물건값으로 지불했던 돈을 환불받길 원하니 같이 가달라고 했다. 혜나와 그곳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했다. 어리고 세상 무서운 줄 몰랐기에 겁 없이 덤볐다. 몇백만 원 중 일부를 환불받았고 친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강남구 삼성동, 1995년 당시 불법 다단계 회사들이 많은 지역으로 뉴스에 나옴) 주변에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청년 무리들이 점심시간이면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이. 손쉽게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밝게 웃던 그들, 그들은 내리막으로 가는 버스를 탄 줄도 모르고 그 버스가 자신을 '피라미드 꼭대기'라는 정거장에 내려줄 거라 믿고 있는 어린아이들 같았다. 예서도 저렇게 가짜 행복에 취해 있었겠지? 아직도 내가 그 행복을 무너트렸다고 원망하고 있을까?


  - 예서, 너를 믿고 단돈 800만 원짜리 옥장판 못 사겠다고 해서 많이 섭섭했지? 미안. 난 너의 진짜 친구가 아니었나 봐. 그래서 말인데 너 나한테 매번 얻어먹은 건 그렇다 쳐도 30만 원 빌려간 건 좀 갚아주라. 이자는 안 받을게. 연락 줘~


  밝고 명랑했던 내 친구 예서피라미드 중간 어디쯤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잘 살고 있기 바란다.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면 더 좋고.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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