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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28. 2022

저녁 여덟 시, 그 남자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저녁 여덟 시,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월패드 화면으로 누군지를 확인했다. 역시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문을 열지 않았다. 그 남자는 한참을 서 있다가 그 자리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까지 안 받으면 또 찾아올까 봐 방에 들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501호인데요. 제가 2주 뒤에 이사 가는데 관리비를 처음에 세 번 내고 안 냈거든요. 확인 좀 해주세요."

그 남자가 이사 간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전에 없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이사 가세요?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501호 남자는 그 뒤로도 하던 짓을 계속했지만 곧 이사 갈 거라 생각하니 참을만했다. 야호~ 드디어  남자가 이사를 간다!



  내가 사는 빌라에는 총 여덟 가구가 살고 있다. 1층은 주차장이고 2층부터 5층까지 층마다 두 집씩 있다. 우리는 10년 전에 302호로 이사 왔다. 어쩌다 보니 남편이 빌라 총무를 맡게 됐다. 다달이 한 가구당 1만 원씩 관리비를 받아 공동전기세와 계단 청소비, 건물 보수에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쓰고 있다. 1층 현관 입구에 관리비에 대한 안내와 계좌번호, 전화번호(남편이 바빠서)를 적어두었다.


  그 남자가 처음 우리 집을 찾아온 건 2년 전 저녁 여덟 시쯤이었다. 나는 약속한 사람이 아니초인종이 울려도 무시한다. 대개는 한번 초인종을 눌러서 대답이 없으면 가는데 그 남자는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할 수 없이 누구냐고 물었다.

"501호에 새로 이사 온 모라고 합니다."

인터폰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관리비 때문에 왔는데요. 1층에 적혀있는 계좌로 보내면 되는 건가요?"

"네 그 계좌로 보내시면 돼요."

"그 계좌가 맞는지 확인을 좀 해주세요."

"무슨... 확인요? 거기 적혀있는 계좌번호랑 예금주명이 맞으면 입금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제가 확인할 수 있게 통장을 보여 주세요."

"죄송하지만 종이통장이 없어요. 입금 확인되면 받았다고 확인 전화드릴게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정확하게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40대로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다음날 저녁 여덟 시쯤  남자가 또 초인종을 눌렀다.

"무슨 일이시죠?"

"관리비 3개월치 입금했는데 확인 좀 해주세요."

입금 내역을 확인하고 남자에게 입금 확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저.. 입금받았다는 문자를 좀 보내주셨으면 하는데요."

"네? 네.. 알겠어요. 관리비 얼마 받았다 이렇게 보내드리면 되는 거죠. 보내 드릴게요."

지금껏 이사 온 사람들 중에 이렇게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 남자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거나 어디서 돈을 떼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좋게 생각하며 넘겼다.


  그 일이 있고 삼 개월 정도 지났다. 여름휴가기간 동안 집안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우리 집 문이 활짝 열려있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물었다.

"이사 가세요?"

"아니요. 공사 중이에요."

남자는 밖에서 집안을 기웃거리다 가던 길을 갔다.


  며칠 뒤 저녁 여덟 시쯤  남자가 또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는지 초인종을 연속으로 눌렀다. 월패드 화면으로 보이는 문 앞에 센서등이 꺼진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이 무섭게 보였다. 남자는 그냥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시죠?"

"이사 가시는 거 아니에요? 문 앞에 놓여있던 우산꽂이가 없어졌네요. "

황당했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들여놨어요. 이사 안 가요. 이사 가게 되면 말씀드리죠. 앞으로는 말씀하실 거 있으면 찾아오지 마시고 전화해 주세요."


  알아듣게 말했으니 안 올 거라 생각했지만 며칠 뒤 또  남자가 초인종을 눌렀다. 손에는 우리 집 우편함에 붙어있던 안내문이 들려있었다.

"정말 이사 가시는 거 아니에요? 박지민한테 등기 우편이 왔었는데 왜 못 받으셨죠?"

난 그 이상한 남자의 입에서 아들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이성을 잃고 말았다.

"저기요. 왜 남의 집 우편함을 뒤지고 그러세요? 등기우편은 낮에 사람 없으면 못 받는 거잖아요. 지금 우리가 관리비 만원 떼먹고 도망갈까 봐 감시하는 거예요? 그렇게 걱정되면 지금 돈 내지 마시고 나중에 이사 갈 때 한꺼번에 내세요!"

그러고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 남자는 한참 동안 문 앞에 서 있다가 돌아갔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잘 생각해 보니 무서웠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그 남자가 피해망상증 환자라고 판단했고 나중에 우리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남편이  남자에게 전화해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고 앞으로 할 말이 있으면 찾아오지 말고 남편에게 전화해 달라고 했다. 아이들만 있을 때  남자가 또 찾아올까 겁이 나 현관문에 걸쇠를 달고 집안에 CCTV를 설치했다. 




  일 년쯤 지났을 때 401호새로운 사람들이 이사 왔다. 어느 날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싸움 장소는 401호 앞이었다.  남자(501호)가 401호에 찾아가 시끄럽다고 항의하며 싸우는 것이었다. 그런 싸움이 몇 번 계속됐다.


  우리 앞집 301호 할머니는 이 빌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람들에 대해 알고 계신다. 할머니 말씀이, 얼마 전 낮에  남자가 401호에서 계속 천장을 쿵쿵 친다며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401호 딸이 집에 혼자 있었는데 남자가 집안에 누굴 숨겨놓은 것 같다며 안까지 들어왔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안 401호 아저씨가 화가 나서 남자를 한대 쳤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부터 그 남자의 복수가 시작됐다. 새벽 1시 혹은 4~5시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온 빌라가 쿵쿵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쿵.. 쿵.. 쿵.. 그 소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됐다.


  301호 할머니 말씀으로는  남자가 낮에도 그렇게 쿵쿵 치는 날이 있었다다. 찾아가서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401호에서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고의로 천장을 치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참다못한 401호가 먼저 이사를 갔다.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 왔다. 한동안 501호 남자가 잠잠했다. 약간의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401호가 문제였던 건 아닐까?


  슬프게도 아니었다.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둔탁한 무언가로 건물 전체가 울리게 쿵.. 쿵.. 쿵.. 몇 시간씩 바닥인지 벽인지를 쳤다.  남자가 피해망상증이라는 예감이 맞았음을 확신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그가 이사 온 지 거의 2년이 돼가기 때문에 전월세 계약기간이 끝나고 이사 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입에서 나온 이사 간다는 말에 만세 삼창이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남자는 이사 가기 전날까지도 쿵.. 쿵.. 쿵.. 치고 나갔다. 관리비는 정확하게 다 냈다. 이 빌라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관리비를 안 내고 이사 간다 말도 없이 가 버린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남자는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말투도 항상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에게 친절한 이웃이 되기에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고, 그의 다름이 두려웠다.

-친절한 이웃이 돼주지 못해 미안해요. 이사 간 곳에서는 평안하게 지내시길 바라요.


  우리 빌라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아무 일 없는 일상과 조용한 이웃들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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