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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r 15. 2023

반창고의 놀라운 용도를 알려준 남자

그의 상상력에 박수를


  대학 졸업 후 6개월 정도 백화점에서 일을 했다. 내가 한 곳은 신사복코너, L사의 남성 캐주얼 의류 매장이었다. 우리 매장 앞에는 정장 매장들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그중 한 매장에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가 있었다. 정장 매장 직원들은 그 회사의 옷을 입고 판매하기에 키가 크고 호감형의 얼굴이 일반적이었는데 그가 눈에 띈 것은 좀, 아니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외모비하 발언인 것 같아 설명은 여기까지)


  어느 날 퇴근길에 백화점 앞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날 나는 약속이 있어서 조금 신경 써서 입고 있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가 말했다.

"너 옷 좀 입는다?"

이게 어디서 평가질이야,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한번 웃어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다음 날부터 그가 나한테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매장에서 틈만 나면 장난을 걸고 우리 매장 앞을 서성거렸다. 어느 날 그가 퇴근 후에 백화점 앞 카페로 와달라고 했다. 그가 고백을 하면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카페로 갔다. 나는 노란색 폴라티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말했다.

"너 옷 좀 입는 줄 알았는데 오늘 옷 입은 센스가 그게 뭐냐?"

고백에 대한 거절 멘트만을 생각하고 온 내게 이건 너무 당황스러운 공격이었다.

"어... 난 괜찮은데..."

"아니, 너 오늘 코디 정말 별로라고, 너 의상학과 나왔다며? 넌 정말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입은 거야?"

내가 어디 면접장이라도 온 건가 잠시 혼란스러웠다.

"아니, 난 유니폼 입으니까 편하게 입은 거지..."

누군가 나를 공격하면 머리가 하얘지는 나는 별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가 다른 말들을 또 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약속 있는 걸 깜빡했다. 먼저 갈게."

그의 말이 잠시 멈췄을 때 이 말을 하고 쌩하니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 불쌍해서 웃어주니까 만만하게 본 거냐. 다음 날부터 그가 보이면 고개를 돌리고 아는 척도 안 했다.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얼마 후에 내가 일하는 매장 샵마스터 언니가 그만두고 남자분이 새로 왔다. 나보다 나이가 좀 많았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매우 재밌는 분이었다. 나는 매장에서 예전보다 많이 웃었고 즐겁게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한테 진짜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 옷을 지적했던 그가 나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언니가 질이 좀 안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목에 그거 쪼가리 자국이라고 같이 놀지 말래."

"쪼가리?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가 키스해서 자국 남은 거라고."

"하, 뭐래?"

내 목에 붙은 반창고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가 (술 먹고) 넘어지는 걸 붙잡아 주려던 친구의 반지 긁혀 상처가 났다. 반창고를 붙였는데 유니폼 셔츠 위로 보이는 위치였다. 그걸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구나, 정말 그 놀라운 상상력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가서 이 반창고 속에는 반지에 긁힌 상처가 있을 뿐이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국이 아니니 이상한 상상 하지 말라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넌 그냥 쭉~~ 너의 상상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으렴.


  그가 퍼트리기로 작정한 말은 나도 모르게 이 매장 저 매장 구석구석을  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목에 붙은 반창고 속에 진짜로 그가 상상한 그 자국이 있다고 해도, 그게 남들에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보란 듯이 꾸준히,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다.


  난 이 일을 겪고 나서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디자이너로 취업이 안돼 들어간 곳이었는데 내가 일을 너무 잘해서 계속 다닐 뻔했다. 백화점을 나온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디자이너 면접을 보러 다녔다. 다시는 그런 놈들이 날 우습게 보지 않을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오늘 나는 A4 용지에 손가락을 베여 반창고를 붙이며 그 생각이 났다. 사람을 앞에 놓고 옷 입는 센스가 있네 없네 무례했던 것도 모자라 황당한 소문을 퍼트린 그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과할 게 없다. 다만 그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 이 글을 쓴다.

- 사람들은 반창고를 뭔가 숨기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 붙인다는 거 넌 모르는 거 같더라. 얼굴만 센스 없는 줄 알았는데 개념 없는 뇌까지, 딱 어울리는 최고의 코디였어. 외모비하 발언은 안 하려고 했는데, 미안~.

결국 사과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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