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치질을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혹은 똥을 누다가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날은 머리에 샴푸 거품을 내다가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다. 선배님이라고 부르라며 깐깐하게 굴다가 내가 좋은 회사로 이직하자 언니라고 부르며 상냥했던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하고픈 말이 남았던 나는 그녀 외 몇 명을 내 글 속으로 불러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내가 만났던 진상들에게 사과하기>라는 주제로 몇 편의 글을 쓰게 됐다. 과거에 나를 힘들거나 곤란하게 했던 사람들을 내 글 속으로 끌고 와 그때 못한 말들을 해주고 싶었다. 글을 쓰는 동안 난 너무너무 신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너무 신나서 잠을 설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한편으로는 내 글이 불편한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이스피싱, 불법다단계 사기, 부당 해고를 당해 괴로운 분이 글을 볼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가벼운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거의 10년, 20년 이상 지난 일들이다. 지금 너무 무거워 쓰러질 것 같은 짐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가벼워지거나 그걸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걸 그분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글을 쓰면서 세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 번째는 진상이라 생각한 그들을 만난 후에 내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그 애와 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을 거다. 힘든 일을 겪고 난 뒤의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됐고 보상처럼 행운이 뒤따라 오기도 했다. 그들은 그저 진상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킨 스승이기도 했다. 앞으로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내가 배워야 할 게 있어 이 사람을 만났구나, 생각하려 한다. 요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사춘기 아이들이다. 아마도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 될 듯하다.
두 번째는 내가 그동안 내 감정보다 남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는 거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흘이 지난밤에 공원벤치에 앉아있었다. 살짝살짝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그와 함께 웃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리움이나 미움이 섞이지 않은 감정으로 그때 참 좋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맺음이 좋지 않았던 만남은 아무리 좋았던 일들도 모두 나쁘게 만들어야 견디기 쉬웠다. 나를 해고했던 실장과도, 나를 피라미드로 끌고 갔던 친구와도 즐거웠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과 상관없이 내 감정은 진심이었는데 그것까지 버릴 필요는 없지 않나. 난 이제 이들 모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반갑게 웃어줄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다.
세 번째는 내가 쓴 모든 글에서 가장 진상은 '나'라는 거다. 나는 소심하고 어리석었고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막 대한다고 느끼면서도 나를 보호할 용기를 내지 못한 걸 사과한다. 지금의 내가 지난날의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뒤에서 몰래 글로 풀어내며 신나 했던 행동이야 말로 진짜 진상 짓이다. <내가 만났던 진상들에게 사과하기>를 브런치북으로 묶으며 나의 진상 짓을 마무리한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