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람 Jun 05. 2023

내게 가장 진상 짓을 한 건 나였다

  

  나는 양치질을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혹은 똥을 누다가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날은 머리에 샴푸 거품을 내다가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다. 선배님이라고 부르라며 깐깐하게 굴다가 내가 좋은 회사로 이직하자 언니라고 부르며 상냥했던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하고픈 말이 남았던 나는 그녀 외 몇 명을 내 글 속으로 불러내기로 마음먹다.


  그렇게 <내가 만났던 진상들에게 사과하기>라는 주제로 몇 편의 글을 쓰게 됐다. 과거에 나를 힘들거나 곤란하게 했던 사람들을 내 글 속으로 끌고 와 그때 못한 말들을 해주고 싶었다. 글을 쓰는 동안 난 너무너무 신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너무 신나서 잠을 설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한편으로는 내 글이 불편한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이스피싱, 불법다단계 사기, 부당 해고를 당해 괴로운 분이 글을 볼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가벼운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이야기들은 거의 10년, 20년 이상 지난 일들이다. 지금 너무 무거워 쓰러질 것 같은 짐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가벼워지거나 그걸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걸 그분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글을 쓰면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 번째는 진상이라 생각한 그들을 만난 후에 내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그 애와 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을 거다. 힘든 일을 겪고 난 뒤의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보상처럼 행운이 뒤따라 오기도 했다. 그들은 그저 진상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킨 스승이기도 했다. 앞으로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내가 배워야 할 게 있어 이 사람을 만났구나, 생각하려 한다. 요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사춘기 아이들이다. 아마도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 될 듯하다.


   번째는 내가 그동안 내 감정보다 남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는 거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흘이 지난밤에 공원벤치에 앉아있었다. 살짝살짝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그와 함께 웃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리움이나 미움이 섞이지 않은 감정으로 그때 참 좋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맺음이 좋지 않았던 만남은 아무리 좋았던 일들도 모두 나쁘게 만들어야 견디기 쉬웠다. 나를 해고했던 실장과도, 나를 피라미드로 끌고 갔던 친구와도 즐거웠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과 상관없이 내 감정은 진심이었는데 그것까지 버릴 필요는 없지 않나. 난 이제 이들 모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반갑게 웃어줄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다.


  세 번째는 내가 쓴 모든 글에서 가장 진상은 '나'라는 거다. 나는 소심하고 어리석었고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막 대한다고 느끼면서도 나를 보호할 용기를 내지 못한 걸 사과한다. 지금의 내가 지난날의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뒤에서 몰래 글로 풀어내며 신나 했던 행동이야 말로 진짜 진상 짓이다. <내가 만났던 진상들에게 사과하기>를 브런치북으로 묶으며 나의 진상 짓을 마무리한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09화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