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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un 02. 2023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뿐


  이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았다. 이건 너무나 속상했던 기억이고 어떻게 끝맺음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진상들에게 사과하기>에 쓰려던 에피소드를 다 쓰고 브런치북으로 묶으려 하니 목차가 최소 열개이상이어야 한다는 빨간 글씨가 떴다. 일단 써 보자. 결론은 어떻게든 나겠지.




  시래기는 내가 6개월간 일했던 백화점 남성복 매장의 샵마스터였다. 나이가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삼십 대 초반이었고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한 인상에 말을 재밌게 했다. 처음 3개월 정도는 깐깐한 성격의 언니와 일했는데 좋은 분이었지만 늘 긴장해야 했다. 반면 시래기는 늘 웃으면서 일했고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털어놔 금세 편안해졌다.


  매장 영업 종료 시간은 여덟 시. 여직원들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 검사를 받고 퇴근했다. 남자들보다 이십 분 정도 늦게 나가는 게 보통이었는데 시래기는 늘 버스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렸다. 날마다 같은 좌석버스를 타고 신촌까지 갔다. 가끔 신촌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시시덕거리다 헤어지기도 했다.


  시래기의 후배들이 백화점 근처로 놀러 오면 꼭 나를 데려갔다. 같이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갔다. 그 후배 중 한 명을 내게 소개해줬다. 그 후배를 가끔 만나기는 했지만 둘이 만난 적은 없었다. 내 친구, 그의 친구들 몇 명이 함께 만났다. 시래기도 그렇고, 그가 소개해준 후배도 그렇고 그냥 좋은 사촌 오빠들 같았다.


  시래기와 내가 매장에서 하하 호호 즐겁게 일하는 걸 날마다 보는 옆매장 여사님이 내게 슬쩍 말했다.

"내가 지켜보니까 사람 참 좋은 거 같더라. 저런 사람 만나야 돼. 둘이 잘 어울려."

"아휴, 아니에요. 우린 그냥 친한 거예요."

내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 매장 사장은 남성복 매장 두 개와 같은 브랜드의 액세서리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액세서리 매장은 1층인데 1층은 밤 열 시까지 영업을 했다. 어느 날 1층에서 일하던 직원이 아파서 한 달 동안 쉬게 됐고 내가 대체 근무를 하게 됐다.


  열 시에 백화점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여덟 시에 이미 퇴근했을 시래기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설레기 시작했다. 남성복 매장이 문을 닫으면 그는 백화점 앞에 있다가 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으로 왔다. 한 달 동안 날마다 그렇게 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졸음이 쏟아져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기도 했다. 그는 쉬는 날에도 몇 번씩 내게 전화를 했다. 점점 편한 오빠가 아닌 남자로 느껴졌다. 눈빛을 보면 안다. 분명 그도 같은 마음일 거라 믿었다.


  백화점에는 내 목에 반창고 하나 붙인 걸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놈이 있었다. 내가 시래기와 날마다 매장에서 웃으며 지내는 걸 보고 질투한 것 같기도 했지만 신경 쓸 가치가 없는 놈이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 안 했지만 사장은 회식만 하면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우기고 술 한잔 더하자며 찝쩍거렸다. 시래기와 함께 있는 건 좋았지만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전에 다니던 회사 과장님이 어떻게 지내냐며 연락이 왔고 타 회사에서 직원을 구하는데 나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 회사에 면접을 보고 와서 백화점을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시래기가 바로 다른 사람을 구했는데, 전에 나한테 소개해준 후배였다. 좀 의외의 전개였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내가 백화점을 그만두는 날 시래기는 뭔가 예전과 다른 느낌이었고, 일이 있다며 회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에 시래기에게 전화해 만나자고 했다. 술을 어느 정도 마셨을 때 용기를 내 고백했다. 좋아한다는 내 고백에 시래기는 그냥 웃었다. 내가 취한 것 같다며 택시를 잡아 태웠다. 뒤를 돌아보니 시래기가 내가 탄 택시를 보며 씩 웃고 돌아섰다. 예전에 본 적 없는 낯선 웃음이었다.


  다음 날, 시래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를 피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시래기가 내게 소개해줬던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취해 있었다.

"네가 고백했다며? 오늘 그러더라. 네가 자꾸 전화해서 미치겠다고. 네가 매장에서도 맨날 들이대서 스트레스받았었대. 너 그러면서 나는 왜 만난 거냐?"


  아...... 그 웃음이 그런 거였어? 나는 벌을 받는 걸까. 순수하게 나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우습게 보였던 때가 있었다. 착한 남자보다는 나쁜 남자에게 끌렸다. 어쩌면 처음으로 착한 모습에 끌렸던 건데, 시래기는 나쁜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최상위 나쁜 남자였다.


  3일 정도 술을 마시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백화점을 찾아가서 따귀라도 한 대 갈겨줄까,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나를 보고 웃고 기다린 거냐고 따져 물을까,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듣고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진실을 아는 게 두려웠다.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내가 위로받을 길은 없었다. 그냥 접어 넣어두었다. 세상엔 머리로 이해하지 못해도 넘어가지는 일이 있는 거라고, 안갯속을 걷는 마음으로 더듬더듬 앞을 향해 걸었다. 나는 가기로 한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고, 포기했던 디자이너 면접을 보러 다녔다. 더는 그런 놈들과 엮일 일 없는 세상으로 가야만 했다.


  백화점에서 보낸 6개월, 손님들 중에는 별로 진상이 없었다. 진상은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나에 대해 더러운 상상을 하고 소문으로 퍼트린 놈과 회식만 하면 나를 어떻게 한번 해보고 싶어서 안달 났었던 놈, 웃는 얼굴로 다가와 지가 먼저 꼬리 쳐 놓고 날 스토커 취급한 진짜 진상 나부랭이들. 이들을 모아놓고 보니 정말 눈물 나게 역겹다. 개쓰레기들! (브런치팀, 이런 표현 쓰면 심의에 걸리나요? 이건 진실한 마음의 소리라 순화가 어렵네요.)



  젊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었다. 저런 진흙탕 같은 곳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나온 것에, 이 모든 일들이 다 지나간 일들임에 감사한다. 내가 겪은 일들은 결국 내가 가야 할 곳을 향해 나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이 내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기에, 그가 내 인연이 아니었기에 그런 일들을 겪어야만 했던 거다.


  마음속에 접어 넣어두었던 기억을 꺼내보니 그냥 쓰레기 조각이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뿐이다. 오늘은 사과를 할 마음이 끝까지 생기지 않는다. 단지, <내가 만났던 진상들에게 사과하기>라는 매거진 제목에 맞지 않음을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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