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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pr 26. 2023

사랑하는 남편이 불청객이 되는 순간


막내딸의 건강검진이 있어 병원을 갔다. 진료를 마치고 다섯 시쯤 막내딸과 피자를 먹었다. 첫째는 하교 후에 바로 학원으로 가면서 저녁을 먹었고 둘째는 친구 생일 파티에 갔기 때문에 오늘 저녁밥은 안 해도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면 집 안이 어떤 상태든 침대에 바로 누우리라 다짐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집안에 생각지 못한 불청객이 와 있었다. 불청객이란 표현은 좀 미안하긴 하지만, 평균 퇴근시간 열 시 삼십 분이던 남편이 여섯 시에 불쑥 들어와 있으니 반갑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웬일이야? 밥은?"

남편을 보자마자 내 머리에 떠오른 건 ''이었다.

"나 밥 안 먹었어. 배고파. 밥 먹자."

"우린 먹고 들어왔는데. 전화 좀 해 주지. 밥 없어."

"그럼 라면 끓여줘."

"라면도 없어."


퇴근하고 바로 병원에 다녀오느라 피곤한 데다 내 배가 부르니 꼼짝도 하기 싫었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깜빡 졸았다. 


"나 그럼 나가서 먹고 올게."

남편이 굳은 표정으로 옷을 챙겨 입었다. 장난인가 했는데 차키를 챙기고 신발을 신으려고 했다. 단계 없이 곧바로 최고치의 화가 끓어올랐다.

"그러고 나가면 어떻게 해? 밥 하면 될 거 아냐!"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질렀다. 놀란 남편이 조용히 신발을 벗었다.



쌀을 씻으면서 구시렁거렸다.

"일찍 올 거면 전화를 하고 와야 할거 아냐. 갑자기 일찍 와서 밥 달라고 하면, 여기가 뭐 식당이냐고!"

급하게 밥을 하고 고기를 볶아 김치, 쌈채소와 같이 차려줬다.


"자기 요즘 남성호르몬이 넘치는 거 같아. 무서워."

남편이 밥을 먹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집에 일찍 들어오려면 전화를 좀 하고 와."

조금 전에 심하게 소리친 게 무안해진 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내 집에 들어오는데 꼭 전화를 해야 해?"

"응, 해야 해."

"내가 맨날 일찍 오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밥 좀 차려달라는데 그렇게 하기 싫어?"

"맨날 늦게 오다가 먹을 거 없는 날만 꼭 일찍 오잖아. 이제부터 연락 없이 일찍 들어오면 밥 안 줘."


얼마 전부터 나는 갱년기 전조 증상인지 단계 없이 확 끓어오르곤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



며칠 뒤에 남편이 일곱 시쯤 들어온다고 전화를 했다. 지난번 일이 미안해서 정성껏 저녁을 차렸다. 남편이 좋아하는 오징어볶음과 나물반찬을 해놓고 기다렸다. 온다는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나도 안 와서 전화를 걸었다.

"미안, 갑자기 미팅이 잡혔어. 먼저 먹어."

"야~~~ 그깟 전화 한 통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애들 다 밥 안 먹고 기다렸잖아. 다시는 집에 와서 저녁 먹을 생각하지 마!"

온 동네가 떠나가게 소리를 질렀다. 와, 나 이러다 득음하는 거 아냐? 인내심을 쌓으며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진정한 득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기분이다.



그깟 전화 한 통 제때 안 하는 18년 차 중고 남편을 이제 와서 불량이라고 반품할 수도 없고... 생각해 보니 18년이나 이 모양이면 불량이 아니라 원래 그런 기능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남편은 전화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정말 불청객은 그깟 전화 한 통 못할 만큼 정신없이 일하는 남편이 아니라 갱년기 앞세워 버럭 하는 내 마음일 수도 있겠다. 라면이나 안 떨어지게 채워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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