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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pr 07. 2023

남편의 엄마가 돼 주고 싶었던 날


통장 잔액 57,400원. 월급 타서 카드값, 보험료, 저축 등이 빠져나가고 나면 보통 한 달에 십만 원 정도가 남아 내 비상금으로 쓴다. 이번 달은 57,400원이 남았다. 거의 카드를 쓰현금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통장을 스쳐지나 사라지고 말 숫자를 위해 또 한 달을 살아갈 생각에 한숨이 난다.


퇴근길에 우리 집 우편함에 꽂혀있는 봉투를 보니 구청 자원순환과 에서 온 우편물이다. 그 안에 든 것은 내가 버린 종량제 쓰레기봉투 안에 음식물이 섞여 있으니 과태료를 내라는 통지서였다. 얼마 전에 떡이 먹고 싶어 조금 많이 샀다. 먹다 남은 떡이 포장지 안에서 상했고 만지기 싫어 그대로 쓰레기봉투 안에 넣어서 내놓았다. 그 떡과 주소가 적힌 택배 종이가 증거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다. 빼박이다.


과태료는 10만 원, 의견제출기한 내 자진 납부하면 20% 감경돼 8만 원이라고 적혀있다. 지금 통장에 57,400원밖에 없으니 아깝지만 그냥 나중에 10만 원 내야겠다 생각하며 우편물을 감춰뒀다. 아이들에게는 부끄럽고 남편에게는 잔소리 들을 일이다.



다음 날 오후에 남편이 내게 전화를 했다.

"나 경찰서 왔어. 뺑소니 신고돼서."

"뭐? 뺑소니를 당했다고?"

"아니, 내가 사고를 내고 도주했다고 고소당해서 경찰서 왔다고."

"어쩌다가?"

남편은 요 며칠 사업에 문제가 생겨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차를 빼다가 옆차를 긁은 것도 모르고 그냥 갔다고 한다. 피해 차량 운전자가 뺑소니 사고로 고소를 해서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거였다. 피해 차량 운전자에게 연락하여 사정이야기를 하고 사과를 하니 그쪽에서 이해하고 고소를 취하했다. 상대차가 비싼 외제차라 내년에 보험료 할증이 많이 되겠지만 사람이 다쳤거나 당장 돈 들어갈 일은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경찰서에서 온 남편이 코가 빠져 있다. 난 이럴 땐 위로 보다는 농담을 건네는 편이다.

"자기야, 요즘 자기 힘들게 하는 그놈들 연락처 줘봐. 내가 싹~ 다 발라버릴랑께."

어설픈 내 조폭 흉내내기에 남편이 살짝 비웃듯 웃었다.

"힘들면 다 때려쳐. 내가 자기 먹여 살릴게. 대신 아주 쪼~옥금 먹어야 할 거야."

남편이 웃었다. 사실 남편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부리는 허세다.

"자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요새 입맛이 없긴 한데... 잡채가 먹고 싶네."

이런, 난 나가서 뭐 맛있는 거 사 먹자는 얘기였는데.


결혼하고 제대로 잡채를 만든 건 둘째 딸 초2 생일파티 때 딱 한 번이었다. 잡채는 어렵다기보다는 좀 귀찮은 요리다. 생각해 보니 결혼생활 십팔 년(욕 아님) 동안 남편을 위한 요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 늘 아이들 위주였다. 남편이 섭섭해하면 '그렇게 억울하면 내 아들로 태어나지 그랬냐' 거나 '자기 엄마한테 가서 해달라고 해'라고 했었다.



다음 날(토요일), 오늘 하루쯤은 이 남자의 엄마가 되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일찍 장을 봐서 잡채를 만들었다.

"맛있다!"

남편이 잡채를 두 접시나 비웠다. 오후에는 애들을 집에 놔두고 남편과 둘이 산책을 하고 갈비를 먹으러 갔다. 전에 없이 내가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살뜰히 아들 챙기는 엄마처럼 난 괜찮으니 많이 먹으라고, 타지 않게 부지런히 뒤집고 또 뒤집어 남편의 앞접시에 놓아줬다. 남편이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준다. 내가 쌈을 싸서 남편 입에 넣어준다. 가족끼리 식사하는 식당에서 우리만 가족이 아닌 듯한 기분이다.


집에 돌아와 남편이 편안하게 누워 말했다.

"참, 나 지난번 전자책(2년 전 쓴 프로그램 기술서) 좀 팔렸나 봐. 인세 15만 원 들어왔더라."

"와~대박. 자기 정말 멋져. 능력자!"

남편을 향해 엄치 척을 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마디 외침이 들렸다.

'바로 지금이야!'

지금 이걸 내밀면 잔소리도 안 듣고 다음 달 비상금도 지킬 수 있다! 아, 오늘 하루쯤은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엄마이고 싶었는데...


슬그머니 내밀었다. 숨겨놨던 과태료 통지서를.

"자기야, 내가 먹다 남은 떡을 일반 쓰레기봉투에 그만.... 지금 내면 2만 원 깎아준대. 계좌이체 좀..."

"인세 받은 거 다 줄게. 과태료 내고 맛있는 거 사 먹어."

와우~ 남편의 엄마가 돼 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아빠가 생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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