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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pr 20. 2023

나를 유혹하는 달콤한 속삭임, 뭐 사가?


"뭐 사가?"

내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퇴근길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자주 던 말이다.

"뭐 사가? 그 말이 난 그렇게 달콤하게 들리더라."

지난 연말에 티브이를 보다가 남편에게 이 말을 한 뒤로 남편이 달콤한 간식을 사 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사무실이나 거래처 근처 카페에서 타르트나 와플, 도넛등을 보면 내게 전화를 해 "뭐 사가?"라고 물었다. 남편은 늘 나와 세 아이가 사흘은 먹어야 될 정도의 양을 사 왔다. 난 원래 단 걸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어느새 중독되고 있었다. 남편이 빈손으로 들어오면 섭섭했다. 그런 날은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다 먹으며 겨울밤을 보냈다.



3월 초, 늘 직선으로 걷던 산책길을 지그재그로 걸었다. 이쪽에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들을 보고 저쪽으로 가 산수유 꽃을 보고 신이 났다. 점심때마다 걸었던 길인데 따사로운 햇살 아래 유독 더 파릇파릇한 꽃망울과 하얗게 노랗게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가 눈에 띄었다.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걷는데 갑자기 배 둘레에 편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헉-단추 떨어진 거 아냐? 황급히 허리춤을 부여잡아 보니, 다행히 떨어진 건 아니다. 배에 힘을 팍 주고 단추를 잠그며 깨달았다. 이 바지는 작년 가을에 헐렁했던 바지라는 걸.


뱃살, 너 정말 너무한다. 겨우 한 계절 달콤유혹에 빠져 허우적댔다고 이렇게 신호를 주다니! 뱃살이 두둑해지는 건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저 바지가 다시 헐렁해질 때까지 간식을 먹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무실에서 심심할 때마다(자주 심심하다) 하나씩 까먹던 쿠키 대신 견과류를 먹기로 했다. 저녁식사 후에 아이스크림과 도넛등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대신 산책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뭐 사가? 이 말 앞으로 금지야!"


다음 날 저녁을 가볍게 먹고 막내딸과 산책을 다. 한 시간쯤 걷고 나서 딸이 말했다.

"엄마, 나 배 고파."

사실 나도 산책길을 걸으며 이 길가에 맛집이 매우 많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저쪽에 치느님이 계속 부르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한창 성장기인 딸의 배고픔은 절대 외면할 수 없었던 어미는 치느님의 부름에 할 수 없이 응답했다.


다음 날도 산책을 나갔다. 산책길에는 어떤 맛일지 먹어봐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빨강맛 떡볶이'라는 이름의 떡볶이집이 있다. 그 맛이 궁금해서 짜증이 난다. 생각해 보니 건강에 뱃살 보다 안 좋은 게 스트레스 아니던가. 이건 건강을 위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희뿌연 연기가 솟아오르는 신비한 장소로 이끌리듯 가보니 그곳은 만두가게였다. 또 며칠 뒤에는 퇴직금으로 푸드트럭을 장만하여 인생 2막을 시작하신 듯 보이는 노부부의 타코야끼 트럭이 보였다. 날마다 그 앞을 지나다니며 한 번도 사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많이 살 수록 싸니 넉넉하게 샀다.


에 나가는 산책길은 달콤한 유혹 속으로 풍덩 빠지는 길이었다. '뭐 사가?'에 이어  산책도 금지하기로 했다. 




달콤함이 빠진 은 길고 무료했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게 뱃살만 탓할 일이니?

겨우내 바지는 작아졌지만 얼굴은 팽팽해졌잖아. 뱃살은 너를 젊어 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했어. 그 노력을 몰라주고 뱃살을 빼 없애려 한다면 억울함을 주름으로 되갚아 줄 거야. 뱃살은 아무 잘못이 없어. 굳이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잘못한 건 바지라고~. 앞으로는 단추 풀릴 염려 없는 고무줄 바지를 입으렴!


나를 유혹하는 달콤한 속삭임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뭐 사와!"


나를 유혹하는 달콤한 속삭임


'뭐 사와!'는 아직 금지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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