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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y 11. 2023

그들이 멋있는 이유, 몰입

박효신, 임윤찬 그리고 나


오랜만에 혼자 외출을 했다. 4월의 마지막 날, 일요일 오후 섯 시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먹을 저녁으로 마라탕을 곰솥으로 끓여놓고 나왔다. 지금부터 집에 들어갈 까지 집 생각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 500m 정도 걸어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다. 광화문 광장이 예전에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라서 깜짝 놀랐다. 테두리로 꽃과 나무, 앉아 쉴 수 있는 벤치와 바닥분수가 있었고 중앙에는 '서울 컬처 스퀘어'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쭉 둘러보니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은 여전히 떡 버티고 계셔서 여기가 광화문 광장이 맞긴 맞구나 싶었다.

2023년 4월 30일 오후 광화문 광장


오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뮤지컬 베토벤, 박효신을 보기 위해서다. 2월 말에 박효신이 예술의 전당에서 이 공연을 할 때 1차 관람을 했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 작품의 일부를 수정, 보완하여 시즌2를 공연 중인 걸 알았지만 두 번이나 보기엔 티켓 가격이 너무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아 볼 계획이 없었다.


공연 일주일 전에 심심해서 티켓사이트를 열었는데 누군가 취소한 자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박효신 캐스팅에 1층 앞쪽 좌석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모두 매진이었다. 분명 누군가 치열하게 샀다가 눈물을 머금으며 내려놓았을 그 자리, 1층 열 번째 줄 가운데 VIP석 자리 하나, 와 이건 날 위한 거다! 마침 남편 몰래(말하지 않았을 뿐) 다달이 조금씩 넣었던 적금이 만기여서 현금으로 바로 질러버렸다. 자기야, 미안^^





같은 공연 두 번째 관람, 나는 오늘 박효신만 열심히 다. 박효신이 연인을 그리워하며 노래하는 장면에서, 혼자 그 큰 무대를 채우는 예술가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두렵지 않을까?


공연 막바지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같은 대사, 같은 노래를 몇 달 동안 지치지 않고 부를 수가 있지? 심지어 그는 지난번 공연 때 보다 훨씬 더 완벽해졌다. 그는 베토벤 그 자체로 보였다.


그 순간 떠오른 단어는 '몰입'이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베토벤이 되는 거였다. 그가 박효신이 아닌 베토벤으로 보이면서, 그는 혼자 무대에 서있는 순간에 외로움이나 두려움 따위 느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나는 경복궁역으로 가야 하는데 내 발은 광화문역 1번 출구 쪽을 달렸다. 앞서 달리는 사람들을 뒤따라 간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박효신의 퇴근길. 풋, 내가 여기 서 있게 될 줄이야.


30분 정도 기다리니 그가 나왔다. 시간은 밤 11시, 세종문화회관의 불이 모두 꺼졌다. 아, 박효신을 기다리던 팬들이 모두 아쉬움의 탄성을 질렀다. 너무 어두워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설렜다. 박효신이 내 앞쪽으로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아, 너무 좋은데 그는 순식간에 가버렸다.


인적 드문 광화문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간다. 광화문에서 한바탕 축제를 즐기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요즘 말로 '덕질'이라는 걸 하는 건 평생 처음이다. 이 나이에 연예인 쫓아다니는 거 부끄럽지만 이건 내 마음이 아직 말랑말랑하다는 증거다.


광화문 광장의 밤, 내 앞을 지나가는 박효신


다음 날 아침에 베토벤 곡을 듣다가 유튜브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를 보게 됐다. 아니, 이 청년은 뭐지? 몇 세기 전에 살았던 위대한 음악가들이 다시 태어난 건 아닌가 싶었다. 그의 연주는 음악을 모르는 내가 들어도 경이롭다. 손가락의 움직임, 그의 표정... 그는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음악과 하나였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는 베토벤이 되고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때는 라흐마니노프가 됐다. 완전한 몰입이다. 어제 박효신에 이어 임윤찬까지, 자신을 완전히 밀어 넣어 하나가 되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나는 이들이 천재라는 사실보다 자신의 세상에 완전히 몰입하는 모습이 정말 부럽다.



누군가 자신의 일에 몰입한 모습을 볼 때 멋있다고 느낀다. 과거의 나를 돌아볼 행복했던 기억은 상을 받았거나 몇 등 안에 들었던 기억 보다 뭔가에 몰입해서 열심히  봤던 기억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 지금의 내게 용기를 준다.


지금의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다. 뭔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욕심을 내려는 생각들은 날려버리자. 과정을 즐기고 몰입한다면 지금이 내 삶에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다. 10년쯤 후에 오늘의 나를 생각하며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 그때 쫌 멋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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