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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y 16. 2023

안녕하지 않거든요?


"안녕하지 않거든요."

요즘 아침마다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라기보다는 그냥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적고 있는데 그날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바로 저 말이었다. 




전날(5월 8일) 오전 근무시간이었다. 사무실 전화벨이 울려 받아 보니 며칠 전 통화한 고객의 목소리다.

"○○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안녕하지 않거든요."

상냥한 내 말에 돌아온 예상외의 대답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왜, 무슨 사고라도 있으셨어요?"

혹시 장난인가 싶었다.

"아니, 계좌번호를 문자로 찍어줘야 입금을 할 거 아닙니까? 왜 안 찍어줘요?"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난 문자를 보내겠다고 한 기억이 없다. 메일을 보냈는데 그는 메일을 확인하지 못했단다. 마음에 없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입금해야 할 금액과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냈다. 그걸로 상황은 끝이었다. 그냥 문자 한 번 보내달라고 하면 될 일에 그의 안녕이 깨졌다는 게 이해가 안 됐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평소대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하고 오후 업무 틈틈이 글을 써서 발행했다.


퇴근 전에 아들에게 카톡이 왔다.

-엄마, 오늘 저녁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오늘 저녁은 제가 해드릴게요.

-와, 정말? 엄마가 마트에 삼겹살 배달시켰으니까 네가 구워주면 되겠네.

보통 고기를 먹게 되면 남편이나 내가 주방에서 구워 접시에 담아 식탁으로 가져다주며(식탁은 거실에 있다) 아이들 먼저 먹으라고 한다. 오늘은 편안히 앉아 아들이 굽고 딸이 날라다 주는 고기를 먹었다.


아들(고2)과 딸(중3)이 돈을 모아 케이크를 사 왔다. 제과점에서 진열해 놓고 파는 케이크가 아니고 어버이날을 위해 주문해서 만들어 온 케이크였다. 아이들이 부모를 위해 이런 걸 할 생각을 했다는 게 기뻤고 막내딸(초3)이 들고 온 감사카드와 종이로 접은 카네이션을 보고 흐뭇했다.


저녁 설거지를 걸고 보드게임을 했다. 둘째 딸이 어린이날 선물로 고른(도대체 몇 살까지 어린이냐?) '루미큐브'라는 게임인데 숫자를 이리저리 끼워 맞추려면 처음 내게 주어진 숫자가 어떤 숫자인지도 중요하지만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게임이다. 매번 내가 꼴찌였는데 설거지하기 싫어 눈에 불을 켜고 했더니 이번엔 꼴찌를 면했다. 남편이 설거지를 했다.



그날 하루 내가 기분 나빴던 건 오전에 아주 잠깐이었다. '안녕하지 않거든요'라는 그의 무례한 말을 먼지처럼 툭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행복했던 시간들을 모두 제쳐두고 잠깐 기분 나빴던 가장 먼저 떠올린 걸까?



우리의 뇌는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을 3배 이상 더 잘 기억한다.


몇 달 전에 마음연구소 박상미소장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 기억 속에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이 더 많은 건 진짜 안 좋은 일이 더 많아서가 아니라 안 좋은 일을 더 잘 기억하는 뇌 탓인 거다. 물론, 좋은 일을 더 잘 기억하는 축복받은 뇌를 가진 사람도 있다.


한 동안 감사일기를 쓰다가 말았다. 억지로 찾아 쓰는 감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감사함을 굳이 찾아서 되새겨야 하는 이유. 나는 좋은  보다 화나고 억울한 일을 더 잘 기억하는 매우 평범한 뇌구조를 가진 사람이라서다. 아침일기에 전날 좋았던 일 세 가지를 찾아서 쓰고 읽으며 기분 나빴던 한마디 말을 꾸~욱 밟아버리기로 했다.


<5월 8일 좋았던 일>

1. 아이들이 나를 위해 고기를 구워주고 케이크와 카드를 준비했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2. 게임에서 이겨 남편이 설거지를 했다. 신났다.

3.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며 햇볕을 쬐고 음악을 듣고 어느새 푸르러진 나뭇잎들에 감탄했다. 행복했다.

4. 회사에서 글을 쓸 시간이 있었다. 난 운이 좋다.

5. 안녕하지 않거든요,라는 말이 글감이 됐다. 룰루랄라~♪

세 가지만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많았다.


내가 적은 기분 좋은 일들을 내 귀에 들려주니 웃음이 났다. 그냥 쓰기만 하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으면 훨씬 더 기분이 좋아진다. 안녕하지 않거든요? 이제 그런 불친절한 말 따위가 내 기분을 망칠 일은 없다. 내게 안녕하지 않다는 말을 해 큰 깨달음을 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글을 쓰려고 다시 들었는데 너무 좋아서 공유합니다.

https://youtu.be/YGAcs5mtR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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