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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ug 21. 2022

나는 날마다 고향에 간다

할머니가 보고 싶은 날에


오늘도 디지털 미디어시티역에서 운정역으로 가는 경의선 전철을 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차내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는 사람들을 보았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할머니다. 옆에 둔 배낭에는 등산지팡이가 삐죽 나와 있었다. 그 할머니를 보는데 내 할머니 생각이 났다.


1983년 7월,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여름방학이었다. 언니와 함께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갔다.  


운정역에 내려 논과 밭 사이의 기다란 길을 뛰듯이 걸어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할머니~~"

부추를 다듬던 할머니가 언니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셨다.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옅은 색 한복 차림에 새하얀 머리에는 은색 비녀를 꽂고 계셨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커다란 대접을 들고 나오셨다. 미숫가루였다. 달달하고 시원한 미숫가루를 언니와 나눠 마셨다. 그리고 뒷마당으로 가 앵두를 잔뜩 따서 입 안 가득 넣었다. 언니와 마루에 앉아 입안에서 씨를 발라 퉤퉤 뱉으며 누가누가 멀리 보내나 시합을 했다.


앞집에 사는 친구에게 달려갔다.

"친구야~ 노올자~"

마당에서 세수를 하고 있던 친구가 까만 얼굴로 하얗게 웃었다. 친구랑 잠자리를 잡는다고 뛰어다니고, 냇가에서 잡히지도 않는 물고기를 잡는다고 옷을 다 적시고 돌아왔다.


어둑어둑해진 할머니 댁 마루에 모기향이 피워져 있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부추와 호박을 잔뜩 넣어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만두를 호호 불어가며 열개쯤 먹었다. 티브이로 어린이 명작동화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벽장(할머니의 보물 창고)에서 초코파이를 꺼내 주셨다. 큰아버지가 할머니 드시라고 사다 주신걸 우리 오면 주려고 아껴두신 것 같다.


언니는 윗동네 사는 사촌언니한테 다. 할머니와 마루에 파란색 모기장을 치고 누웠다. 엄마가 열 밤 자고 데리러 온다고 했다. 엄마가 조금 보고 싶기도 하지만 친구랑 열흘간 놀러 다닐 생각에 신이 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밤하늘 별들이 나에게 쏟아질 것만 다.




3년 전에 사무실을 사장님 댁 근처인 파주로 옮긴다고 했을 때 너무 멀어서 그만 다닌다고  했었는데, 사장님께서 출퇴근 시간을 배려해 테니 계속 다니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사장님 댁은 운정. 아, 운정도 파주였지... 내 기억 속에 운정은 그냥 운정이었다. 내가 태어나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주 갔던 내 고향.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신촌역에서 탔던 기차는 지금은 경의선 전철이 되었다. 경의선 전철은 지상으로만 달리는데 마치 어릴 적 할머니 댁을 갈 때처럼 들판과 비닐하우스, 같은 시골 풍경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 다른 색깔의 옷을 입는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네모난 창이 한 폭의 그림을 담은 액자가 되고, 출근길이 여행이 된다.


숲 속을 달리는 듯한 느낌 (강매역)


36분 정도를 달려 운정역에 내렸다. 운정역 1번 출구는 3층 정도 높이의 육교와 연결된다. 탁 트인 시야에 파란 하늘을 보고 걷노라면 10분 거리의 긴 육교도 즐거운 산책길이 된다. 그렇게 산책을 하며 생각해 보니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이곳에 30여 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나 돌아와 있다는 게 신기하다. 파란 하늘 구름 뒤에서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계신 것만 같다.


1980년대 운정역 (사진 출처 : 다음 검색)
운정역의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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