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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an 15. 2024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왔다

19년 차 부부의 나름 슬기로운 부부싸움 (1화)


"와, 우리 딸 이제 다 컸네. 밥 먹은 그릇도 가져다 놓고. 고마워~"


먼저 식사를 마친 아홉 살 막내딸이 밥그릇과 국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오빠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는 모습이 예뻐 칭찬을 했다.


"아니, 저게 뭐 칭찬받을 일이야? 자기 거만 쏙 가져다 놓고 들어가 버리고. 나중에 다 같이 치워야지."

기분 좋은 내게 남편이 찬물을 끼얹었다.


"무슨 소리야? 난 저렇게라도 해주면 고마워. 자기는 자기 거도 안 치우고 쏙 들어가잖아. 저렇게라도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난 이때 이미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날이 더워서 그랬는지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고, 내 말을 들은 남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애들 교육을 그렇게 시키면 안 되지. 니 거만 잘하면 된다, 그건 아니잖아."


"니 거라도 잘하면 된 거지. 그거라도 안 하면 다 내가 해야 된다고.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잖아."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나도 주말에 애들이 먹고 싶다는 거 만들어 주고, 하느라고 하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건 어쩌다 자기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거잖아. 내가 필요할 땐 부탁해도 안 해주잖아. 왜 내가 다 하는 게 당연한 거냐고!"


아이들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싸움은 이렇게 별거 아닌 일로 시작됐고, 늘 그렇듯 어느 순간 입을 다무는 걸로 끝이 났다.


그릇이 깨지든 말든, 솔직히 다 깨부수고 싶은 심정으로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쓰레기를 내려놓고는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공원을 지나쳐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지하철역을 지나치고 시장을 지나 인적이 드문 낯선 동네까지 걸어갔다.


걸으면서 드는 생각은 '결혼은 왜 한 걸까?'와 '저 인간이랑 계속 살아야 하나?'였다. 그러다가 결국, 아이들 생각에 한숨이 새어 나온다.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의 전화였으나 받지 않았다.

-엄마, 어디야?

딸이 남편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아까 그 전화도 딸이 걸었나 보다. 문자를 무시하고 그저 계속 걸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어깨 위로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이 기분에 비까지 맞는다면 정말 최악이겠지?


횡단보도 앞에 섰다.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길로 되돌아갈 생각이다. 길 건너편에 복권판매점이 보여 들어갔다.


"로또 자동으로 다섯 장 주세요."


카드를 내밀었더니, 주인아저씨가 로또는 현금으로만 살 수 있다고 한다. 휴, 로또라도 품고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는데...


나는 그동안 로또를 사본 적이 없다. 사람이 일생에 얻을 수 있는 행운에는 일정량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행운을 로또로 써버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로또에 내 행운을 다 써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혼자 술이라도 한 잔 할만한 곳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들어갈 만한 곳이 보여도 막상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집 외의 공간에서 혼자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계속 걸으면서 내가 왜 십수 년을 싸워도 좁혀지지 않는 생각의 차이를 가진 남자와 결혼했을까,를 생각한다.


남편이 생각하는 남자의 기준은 아버지다. 성실하게 일만 하고 집에서는 거의 왕처럼 모셔지던 모습.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근하고 들어오시면 무조건 현관 앞으로 나가 인사를 했고, 아버지가 낮잠이라도 주무시면 텔레비전도 틀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식사 중 물 한잔을 직접 가져다 드시는 법이 없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남편 입장에서 보면, 본인은 가끔 아이들에게 맛있는 요리도 해주고 내키면 설거지도 해주는 매우 다정한 남자인 거다. 결혼 후 지금껏 화장실 청소 한 번 한 적 없고,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게 부끄럽고, 본인이 입었던 옷을 여기저기 아무 데나 벗어던지면서도 집안이 어수선하다고 잔소리를 하는, 그런 게 당연한 남자다.


남편의 그런 생각들을 고치려 한다면 우리는 아주 많이 싸워야 할 것이다. 나는 평화롭기를 원했다. 그냥 대충 살자. 마음속 깊숙이 넣어두고 웃으면서 살다 보니 그런대로 행복하잖아. 그런데 가끔씩 이렇게 작은 일이 불씨가 되어 꼭꼭 숨겨뒀던 불만들이 터져 나오곤 한다. 남편과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 만큼 화가 난다.


집에서 나온 지 한 시간이 넘어 주변이 깜깜해졌다. 집 근처 공원에 앉아 한숨을 쉬다가, 심야영화라도 보러 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옷 꼴을 하고 극장까지 가긴 좀 그렇다 생각하면서도 <범죄도시>가 나을지 <미션 임파서블>이 나을지를 열심히 고민하는데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어디야? 니 딸한테 전화 왔었어. 엄마가 말없이 나가서 안 들어온다고."


"집 근처 공원이야. 박 씨랑 싸우고 나왔어."


"왜 싸웠는데?"


"아니, 저녁 먹고 애들이 그릇 가져다 놓는 거 보고 지들꺼만 가져다 놓는다고 뭐라 하잖아. 자기는 자기 거도 안 가져다 놓으면서 말이지. 그리고 평소에 자기가 집안일을 좀 하는 줄 알더라고. 밥 몇 번 한 거 가지고. 우리가 뭐 밥만 먹고살아? 빨래며 청소며 할 일이 태산인데, 그런 거 내가 다 하는 게 왜 당연한 거냐고!"


"야, 그래도 박서방은 조금이라도 하려고 하잖아. 우리 집 김 씨는 라면 하나 못 끓여 먹는 인간이다. 그리고 툭하면 말을 안 해. 지금도 뭐가 삐졌는지 입 꾹 다물고 있어서 아주 속이 터진다. 할 말 있으면 피하지 말고 들어가서 더 얘기해."


그래, 들어가자. 더 싸우고 사과를 받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든 결판을 내자!



* 지난여름에 남편과 싸우고 나서 쓴 글을 서랍에서 찾아 발행합니다.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도 이렇게 유치한 일로 싸운다는 게 부끄럽네요. 집에 들어가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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