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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ug 06. 2022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다

매일 같은 방향으로 걷는 그녀


운정역에 내려 육교 위를 걷고 있는데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 늘 넣어가지고 다니는 작은 우산을 펼쳤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나와 같은 전철에서 내려 나보다 몇 걸음 앞서 걷는데, 나는 장장 600 미터나 되는 이 육교의 끝까지 가야 하고, 그녀는 중간쯤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간다. 나는 날씬한 그녀를 부러워하며 뒤따라 걷곤 했었다.

빗방울이 굵어지는데 그녀는 우산이 없는지 어깨에 메고 있던 천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걸음을 재촉해 그녀 옆으로 다가가 우산을 기울였다.

나를 힐끗 살피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같이 써요."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약 3분간을 어색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지점에서 비가 더 많이 내렸지만, 우린 가야 할 방향이 달랐다.

"전 여기로 내려가요."

"비가 많이 와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바로 아래예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 다시 천가방을 치켜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계속 육교를 걸었다.

그녀의 체온으로 따뜻했던 왼쪽 팔에 날아든 빗방울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뭐 하는 사람일까?... 그녀는 계단 아래 오피스텔 1층에 위치한 작은 카페의 사장님이다. 매사 긍정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카페에 오는 손님들과도 쉽게 친해진다. 꾸준히 필라테스를 하며 몸매 관리를 하고 있다?'

여기까지 혼자 상상하고 피식 웃었다.

머리와 웃옷이 다 젖은 채 마주 뛰어오는 남자가 있었지만, 그와는 내 우산을 나눌 수가 없었다.

방향이 다르니까.

600 미터에 달하는 긴 육교 위에서 갑자기 비를 만나면 피할 곳이 없다.

화장품 파우치 하나 넣기도 버거운 내 작은 가방에 고집스럽게 빼지 않았던 작은 우산 하나가 참 감사한 아침이었다.

 



요즘은 일기예보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고, 예고에 없던 비가 내린다 해도 쉽게 비닐우산을 살 수 있지만 예전에는 갑자기 비가 내리면 방법이 없어 비를 맞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가 많이 내린 어떤 날, 낯선 아주머니의 호의로 우산을 함께 쓰고 딱 달라붙어 어색하게 함께 길을 걸었고 내 팔에 닿은 그분의 체온이 따뜻했던 아주 오래된 기억이 있다.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진 남자가 나에게 우산을 받쳐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비를 맞고 걸어보아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리 없었다).




다음날에도 몇 발자국 앞에 그녀가 걷고 있다.

우산을 한 번 나눠썼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이지만, 만약 내일 그녀의 뒷모습이 안 보인다면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할 정도의 사이는 된 것 같다.

육교 중간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에게 마스크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본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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