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샀길래 만원이나 긁었어?
두 딸에게 영화 티켓을 예매해 주고 팝콘을 사 먹으라고 카드를 줬었다. 극장에서 만원을 썼다고 문자가 왔길래 뭘 되게 많이 사 먹은 줄 알았다. 팝콘 하나, 콜라 하나 산 게 만원이란다. 휴, 물가가 많이 오르긴 올랐구나.
영화가 끝날 시간에 맞춰 극장 앞으로 가서 딸들을 만났다. 극장 근처에 막내딸이 다니는 병원이 있다. 막내딸은 초1 때 성장호르몬 결핍증으로 진단을 받아 내가 날마다 주사를 놔주고 3개월마다 병원을 다닌다. (벌써 2년째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뼈나이가 빨라지고 가슴이 나오기 시작해 성조숙증 증상도 있다.
성장호르몬 결핍인데 어떻게 성조숙증이 오죠?
같이 오는 경우가 있어요. 성조숙증 치료도 같이 받으시길 권해드려요. 대신, 성장호르몬 결핍증과 성조숙증은 동시 진단이 안되기 때문에 성조숙증 치료는 비급여로 받으셔야 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든 치료를 멈출까 3개월을 고민했다. 결국 의사의 권유대로 두 가지를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성조숙증 주사 한방에 20만 원이 넘게 나왔다. 휴, 생각보다는 적게 나왔어. 약국에서 성장호르몬 주사약을 한 달 치 샀는데 전에는 10만 원대였던 것 같은데 20만 원이 넘는다.
약값이 올랐나요?
참, 아이 몸무게가 늘어서 약 용량이 늘었구나. 둘째 딸이 인공눈물을 사달라고 나를 불렀다는데 들리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앞을 향해 걸었다.
버스를 타고 집 근처에 내렸다. 막내딸이 먹고 싶다는 초밥을 먹으러 갔다. 원래 가던 비싼 초밥집 말고 조금 싼 곳으로 갔다. 나는 집에 가서 대충 먹을 생각으로 애들 거 초밥 2인분만 주문했다. 샐러드랑 서비스 국수를 3인분 주시길래 미안해서 맥주를 한 병 시켰다. 딸들이 초밥을 맛있게 먹는다.
모자라면 더 시켜줄게. 많이 먹어. (안 모자라 보여서)
둘째 딸이 인공눈물을 사러 약국에 가자고 했다. 인공눈물은 팔천 원. 아까 맥주 한 병에 칠천 원이었는데, 먹지 말걸 그랬나.
엄마 나 이번 주말에 친구들이랑 수영장 갈 건데 수영복 사주면 안 돼?
너 수영복 작년에 샀잖아.
그거 별로야.
올해까지만 입어.
딸의 입이 삐죽 나온 걸 모른 척했다.
엄마, 나 수박 먹고 싶어.
그래 수박 사가자.
이런, 수박 한 통에 4만 원이라니. 샤인머스켓이 더 싸네.
샤이머스켓이 더 맛있어 보이지 않니?
아들이 학원을 안 가고 있길래 봤더니 열이 난다. 얼마 전에 <싸이 흠뻑쇼>에 가서 흠뻑 젖어 들어오더니 감기에 걸렸나 보다. 오늘은 쉬라고 했지만 속이 쓰리다. 학원비가 하루에 얼만데.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아들에게 뭐 필요한 거 없냐 물었더니 이온음료 한 병 사다 달란다.
마트에서 이온음료를 집어 들고 고민했다. 맥주도 한병 살까. 맥주 냉장고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1리터짜리 카스 페트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릴 때 많이 먹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먹지 않는 맥주. 오늘은 내가 너무 가난하게 느껴져 카스 페트병 이상은 안될 것 같다.
두툼하게 쫙쫙 찢어지는 말린 오징어를 먹고 싶어. 오징어를 씹으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아. 손바닥만 한 오징어가 두 마리 든 봉지 위에 16000원이라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슬며시 다시 걸어둔다. 그 옆에 3500원짜리 조미오징어를 꺼냈다.
맥주를 한 잔 따라 마셨다. 어, 맛있네. 부드럽네. 남편이 가짜 맥주라고 싫어하는 맛이라 나도 별로인 척했는데. 한동안 에일맥주와 수입맥주만 마셨다. 맥주맛도 모르면서. 그럼 소주를 마시지? 소주는 기분이 꿀꿀한 날, 가끔 혼자 그 기분을 즐기고 싶을 때 마신다. 꿀꿀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은 날은 맥주여야 한다.
돈 안 되는 글이나 쓸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부업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맥주 1리터를 다 마실 때쯤, 낮에 온 문자메시지를 들여다봤다.
예매대기 신청하신 좌석의 예매가 가능함을 알려드립니다. 당장 예매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넘어갑니다... 오페라의 유령 조승우.
돈 없어서 페트병에 든 카스 맥주 마시면서 13만 원짜리 뮤지컬 티켓이라니, 하지만 이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조승우배우가 나오는 공연이 아닌가. 신이 나를 시험대에 올린 건가. 왜 하필 오늘이지?
... 이 티켓을 사지 않아도 난 가난할 거야. 그러니 일단 결제.
다음 날, 괜히 샀나 취소할까 고민하다 생각났다. 얼마 전에 보험을 새로 가입하며 실효시킨 보험의 해지환급금을 찾지 않았다는 게. 해지 신청을 하니 딱 뮤지컬 티켓만큼의 환급금이 입금됐다. 내가 낸 돈에서 마이너스 돼서 돌려받은 건데 공돈 생긴 기분이다.
그리고 며칠 뒤에 편의점 냉장고 앞을 서성이다 수입맥주와 카스맥주가 얼마 차이 안 난다는 걸 발견했다. 캔맥주와 페트병 맥주도 큰 차이가 없음을.
양주를 마실까 맥주를 마실까도 아닌, 캔맥주 마실까 페트병 맥주 마실까를 고민했던 월급날 D-20일, 마음이 가난했던 나를 기록해 본다.
P.S. 보험금을 내다가 중도에 내지 않아서 실효된 뒤 찾아가지 않은 해지환급금이 보험사에 엄청나게 쌓여있다고 합니다. 보험사에서 먼저 알려주지 않아요. 혹시 해지환급금 찾지 않은 보험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