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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16. 2023

더럽고 치사해서 살을 빼긴 해야겠는데 말이지


"이거 115 사이즈 있어요?"

"그건 큰 사이즈 안 나와요."

"그럼 115 사이즈 나오는 걸로 보여주시겠어요?"

나는 남편의 옷을 살 때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작아진다. 아무 매장이나 들어가지 못하고 큰 사이즈가 나오는 매장만을 들르고, 거기서도 큰 사이즈 재고가 있는 디자인을 보여달라고 한 후 그중에서 고른다. 내 눈에 예뻐 보이는 옷은 대부분 큰 사이즈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턱대고 골라봤자 속만 쓰리다.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살이 찌기 시작해서 엄청나게 살이 쪘다가 내가 둘째를 낳은 직후에 엄청나게 살을 뺐다. 식단 조절을 하고 새벽에 운동을 하러 나가서는 밤늦게 돌아왔다. 주말에도 운동을 한다고 집에 붙어있질 않았다. 육아는 하나도 안 도와주고 살 빼기에 열을 올렸다. 정말 얄미웠다. 그렇게 했으면 오래 유지나 할 것이지 오래 하지 못하고 다시 살이 쪘다.


"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뺄 수 있어."

남편이 그렇게 말한 지 십오 년이 넘었다. 그 마음은 도대체 언제쯤 먹어지는 거냐! 얼마 전까지 110 사이즈를 샀는데 그것도 불편해 보여서 115 사이즈를 사러 다닌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 남편이 베트남으로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왔다. 여름옷 일주일치, 캐주얼한 티셔츠를 싸야 하는데 마땅치가 않아 급하게 집 근처 아웃렛을 갔다. 이번에는 운 좋게 115 사이즈 티셔츠 두 장과 바람막이 점퍼를 금방 샀다. 사가지고 나오는데 건너편 매장에서 행사를 하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큰 사이즈 티셔츠가 많이 남아있었다. 앗싸,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깔별로 싹쓸이를 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하나씩 입어보라고 하고 별로인 것은 반품을 하러 가지고 갔다.

"죄송하지만 이거 반품 좀 할게요."

"왜, 마음에 안 드신대요?"

"네."

"이 사이즈 입으시는 분들은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그런 거 없으실 텐데요."

"그렇죠..."

반품을 하고 매장을 나서는데 살짝 기분이 나빴다. 아니, 뭐 살찐 사람은 취향 같은 거 없어야 된다는 거야, 뭐야?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나 자기 옷 사러 다니다가 기분 상했어. 더럽고 치사하니까 살 빼자!"

"그럼 나 내일부터 단식할까?"

"단식은 힘드니까 술부터 끊자."

"어. 알았어!"


다음날이 됐다.

"자기야, 나 오늘 회식이야. 내일부터 할게."


다음날이 됐다.

"자기야, 거래처 미팅 끝나고 저녁 먹으러 왔어. 내일부터 할게."


다음날이 됐다.

"자기야, 나 오늘 빡치는 일 있어서 술 마셔. 더럽고 치사해서 못살겠다."


세상에는 더럽고 치사한 일 투성이고, 그래서 살을 빼야겠고, 그래서 살이 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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