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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10. 2023

내 손가락이 남편을 위해 하는 가장 위대한 일


아침에 식탁에 앉아 글을 쓰는데 남편이 웃통을 벗고 다가와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자기야~"

"아, 아침부터 왜 이래?"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침에까지 이러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아이, 그러지 말고. 빨리 끝내자."

남편이 내 옆에 다소곳하게 앉는다. 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걸 알기에 원하는 걸 빨리 해주기로 한다.

"각오해라. 간다."

나는 남편의 길고도 넓은 등짝을 박박 긁는다. 이를 악물고, 그의 등이 손톱자국으로 새빨개지도록.




평소에 저녁을 세 번 정도 차린다. 아이들의 귀가시간이 각각이라 어쩔 수 없다. 밥 차리는 사이사이에 다른 집안일을 하며 막내딸에게 유튜브 좀 그만 보고 숙제해라, 빨리 씻어라 잔소리를 한다. 집안이 정리되고 막내딸이 잠들어야 나도 비로소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휴, 이제 누워야지. 침대에 막 누웠는데 남편이 다가온다.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던지더니 침대가에 앉아 말한다.

"자기야, 나 등 좀."

"아, 진짜. 나한테 왜 이래?"

"그럼 내가 옆집 할머니한테 그래? 좀 긁어주라."

나는 한 손을 들고 힘없이 남편의 등을 긁는다.

"아, 그러지 말고 쫌. 그냥 한 번에 끝내자."

휴, 그래. 얼른 끝내고 자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는다.

"각오해. 나 아까 손톱 깎았어. 피나도 난 몰라."

나는 날카로운 손톱 끝에 온 힘을 실어 남편의 길고도 넓은 등짝을 긁는다. 꼭 양손으로 양쪽 똑같이 긁어야 시원하다는 남편이다.


"자기, 등 긁어줄 사람 필요해서 나랑 결혼한 거야?"

"에이, 자기가 등 긁어주는 게 좋은 거지. 아 거기, 좀 더 위, 가운데로 길게, 이번엔 아래."

"여긴 등이 아니고 엉덩이구만. 엉덩이는 자기가 긁어."

"자기가 긁어줘야 시원해."

나는 남편이 정말 등 긁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거의 매일 밤 그의 등을 긁어야 했다. 결혼 18년 차, 이젠 아주 지긋지긋하다.


"안 되겠어. 이제부터 돈 받을 거야. 하루에 천 원이야."

"그래, 줄게."

아직 돈을 받은 적은 없다.


어제는 남편이 아침부터 길고도 넓은 등짝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각오해라. 간다."

빨리 끝내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잽싸게 긁었다.

"아, 시원해. 기분 좋다. 자기의 손가락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해. 자부심을 가져."

"아, 그래?"


남편의 말을 듣고 내 손가락을 들여다본다. 음식을 만들고 빨래, 청소를 하고 글을 쓰고 단추를 채우거나 신발끈을 묶으면서 내 손가락의 소중함을 생각한 적은 있다. 고작 남편의 등을 긁어주는 일에서 위대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내게는 꾸준히 귀찮았던 그 일이 남편에게는 사랑의 표현으로 느껴졌던 걸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가 시원하게 등을 긁어주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싹 사라지고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을 거라고, 나 혼자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효자손을 선물했지만 쳐다도 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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