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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ul 01. 2023

콩국수가 맛없다고 왜 말을 못 해


  지난주부터 재택근무를 하면서 냉장고 파먹기를 하기로 했다. 우리 집 냉동실은 오래 두고 먹으라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처치 곤란인 것들을 처박아 두는 공간이 된 지 오래다. 가장 많은 건 멸치다. 부모님이 많이 사서 나눠주신 멸치, 명절에 선물 받은 멸치, 바다의 날 마라톤 대회에서 아들과 내가 받아온 멸치... 내가 멸치를 좋아하지 않으니 반찬으로 만들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다. 멸치를 보며 한숨을 한번 쉬고 다른 서랍 하나를 열었다. 그곳에 그득한 건 언제 가져왔는지도 까마득한 콩(백태, 서리태)이다. 그래, 너로 정했어!




  어릴 때는 밥에 들어가는 콩도 별로였지만 특히 여름철에 많이 먹는 콩국수는 내가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국수를 왜 굳이 맛없는 콩국물에 빠트려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 딱 한 번 먹어보고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어느 여름날, 엄마가 집으로 백태콩을 들고 찾아왔다. 콩을 불려서 삶는 법, 갈아서 콩국수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다. 나도 이제 어른 입맛이 된 건지 그날 엄마가 해준 콩국수는 내 기억 속의 콩국수와 달리 너무 맛있었다.


  며칠 뒤 주말에 남편에게 콩국수를 해주겠다고 했다. 전기밥솥에 밥이나 겨우 하던 내가 콩국수를 해주겠다는 말에 남편은 약간 불안한 표정이었다.

"걱정 마. 엄마가 알려줬는데 엄청 쉬워."

미리 불려놨던 콩을 믹서기로 곱게 갈고 국수를 삶아서 부었다. 남편이 콩국수를 한 젓가락 먹었다. 표정이 별로다.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먹는다. 소금이 모자랐나 생각하며 나도 한 젓가락 먹었다.

"이상하다. 엄마가 해준 맛이 아니네. 왜 이렇게 비리지?"

한번 더 먹었다. 변함없이 비리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콩을 엄마가 알려준 대로 불렸다가 갈았...."

엄마한테 내가 콩국수를 만든 과정을 설명하다가 깨달았다. 앗, 콩을... 안 삶았다!


  불린 콩을 삶지도 않고 갈아 비린맛 콩국수를 만들었던 맹꽁이가, 이제는 콩국물에 땅콩도 같이 넣고 갈면 더 고소하다며 엄마한테 오히려 알려드리는 주부가 됐다. 낮동안 불렸던 콩을 저녁때 푹 삶아 갈았다. 한 달간 밥, 빵, 면, 떡 안 먹기 실천 중이라 면대신 실곤약을 넣고 오이를 잔뜩 채 썰어 올려먹었다.


  내가 처음 만든 콩국수를 먹고 당황하던 남편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맛이 없으면 없다고 왜 말을 못 하니? 지금 같으면 바로 지적했을 텐데 그땐 참 착했다, 내 남편. 비린 콩국수를 말없이 먹어준 남편과 콩국수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철없는 딸을 시집보내고 걱정했을 엄마 생각이 나 웃다가 눈물이 나려 한다. 갱년기다. 갱년기에는 이소플라본이 풍부한 콩이 좋다고 한다. 올여름 꾸준히 콩국물을 먹을 생각이다. 


밀가루 면 대신 실곤약을 넣은 콩국수
콩국물 넣은 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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