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3 막내딸의 학교 현장체험학습이 노란 버스 사태*로 인해 취소됐다. 학기 초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체험학습이 갑자기 취소되자 딸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윤아, 엄마랑 가자. 체험학습!"
얼마 전부터 바다를 보고 싶었던 나는 딸의 체험학습을 핑계로 여행계획을 짰다.
어느 바다를 갈까, 검색을 하고 있는데 중3 둘째 딸이 묻는다.
"엄마 바다 보러 가려고? 나도 갈래."
"중학생도 체험학습 신청되니?"
"당근이지."
"그래? 그럼 네 생일날 학교 쉬어라. 그날 정동진 가자."
정동진은 서울역에서 ktx를 타면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기차가 바다 앞에 서기 때문에 이동에 불편이 없어 당일치기 뚜버기 여행으로 딱이다. 우선 ktx 기차표를 예매하고 주변에 갈만한 곳을 검색해 레일바이크와 시간박물관을 예약했다.
10월 20일 금요일 오전 9시에 집을 나왔다. 서울역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우리 동네 김밥 맛집에 들러 김밥을 샀다. 10시쯤 서울역에 도착했다. 기차 출발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아 '서울로 7017'을 산책했다. '서울로 7017'은 만리동에서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넘어가던 고가 차도를 보행로로 만들어 나무와 연못 등으로 가꿔놓은 길이다. 걷다 보니 서울역 옥상정원과 연결된 구간이 나왔다. 우리는 옥상정원으로 들어가 소풍 온 기분으로 김밥을 먹었다.
서울로 7017 & 서울역 옥상정원
11시, 우리가 탄 ktx 이음 열차가 출발했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잠깐 졸다가, 유튜브로 드라마 리뷰를 보다가, 기차역에서 사 온 과자를 먹다가, 그렇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와, 바다다!"
정동진역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기차가 바다 옆을 달리고 있었다. 정동진역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바닷가에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오래전 귀가시계라고 불렸던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곳이다. 그때는 ktx가 없을 때라 밤새 기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해 일출을 보러 왔었다.
"엄만 여기와 본 적 있다."
"아빠랑?"
"... 음..."
엄만 그때 아빠를 몰랐지.
정동진역에 내리자마자 찍은 사진
역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레일바이크와 시간박물관을 예약한 모래시계공원을 향해 10분 정도를 걸었다.
"엄마, 배고파."
기차를 타기 전에 김밥 한 줄 반을 먹고 기차 안에서 과자 한 봉지를 해치운 막내딸이 배고픔을 호소했다. 그래, 이 시간에 배가 안고프면 내 딸이 아니지.
"우리 여기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식당으로 가자."
오늘은 둘째 딸의 생일이니 최고로 맛있는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깔끔하고 비싸 보이는 횟집으로 들어가 3인 모둠회 세트를 주문했다. 여행지라 어쩔 수 없이, 가격에 비해 음식 퀄리티는 별로였지만 우리는 연신 '맛있다'를 외치며 즐겁게 먹었다.
맛있는 점심
온 세상 바람이 다 정동진으로 몰려온 듯 거센 바람이 불었다. 멋 낸다고 얇은 카디건 하나 걸치고 온 둘째 딸이 걱정됐는데 딸은 괜찮다며 바닷가에서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다. 막내는 모래 사이에서 조개를 줍고, 나는 파도 소리를 가만히 듣고 앉아 있었다. 쓱- 쏴- 철썩~ 바다 건너편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려는 듯했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파도
미리 예약해 둔 레일바이크를 30분 정도 탔다. 자전거 타듯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손잡이만 누르고 있어도 되는 전동식이라 편안했다. 바닷가를 옆에 두고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자동으로 찍힌 사진이 두 장에 2만 원이라며 보여주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찾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레일바이크 타는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었다.)
다음으로 시간박물관을 갔다. 운행을 못하는 낡은 열차 내부를 개조해 만든 박물관으로 시간을 주제로 한 여러 가지 전시물이 전시된 공간이었다. 아주 오래된 시계,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 작품 시계, 독특한 시계등 평소 보지 못한 시계들이 많았다. 딸들은 들어올 때 받은 미션지에 답을 찾느라 꼼꼼히 전시물을 둘러봤다.
시간박물관 외부
시간박물관 전시물
박물관에서 나와 다시 바닷가로 가니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커피숖에 들어가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오니 이제 주변이 깜깜하다.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기차역 옆 해변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며 막내딸의 기분 좋은 수다를 들었다. 그리고 바다와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 다음에 또 올게."
기차역 앞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려고 하니 마땅한 식당이 없어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핫바를 사 먹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은 뒤 먹는 컵라면, 국물이 끝내줘요!
7시 30분, 서울행 기차를 탔다. 책을 읽다가 졸다가 보니 어느새 서울역이다.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간 시간은 10시 30분,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딸에게 물었다.
"오늘 체험학습 어땠어?"
"재밌었어. 우리 다음에 또 가자."
"그래, 우리 다음에는 그 배모양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오자."
우리는 오늘 새로운 추억을 하나 만들었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생각에 설렌다. 정동진 파도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다음 버킷리스트, 썬크루즈 호텔에 묵기
정동진 파도 소리 20초, 들어보세요^^
*노란 버스 사태 : 초등학교 체험학습 이동 수단을 일반 전세버스가 아닌 ‘노란 버스(어린이통학버스)’만 이용하게 하는 정부 지침이 발표됐다. 갑자기 노란 버스를 구할 수 없게 된 학교들이 현장체험학습을 취소하고, 버스 회사의 손해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전이 벌어지는 등 거센 후폭풍이 예상됐다. 이후 경찰청이 지침을 무기한 유예했지만 책임소재를 우려한 대부분의 학교들은 현장체험학습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