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떤 분이 회원님을 찾으면서 연락처를 꼭 알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되게 간절한 것 같았는데, 연락처는 알려드릴 수 없다고 했어요."
"저를요? 여기다 전화해서 저를 찾을 사람이 없는데요."
"여기, 이름이랑 전화번호 받아놨어요."
매니저가 내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쪽지에 적힌 이름을 보니 중학교 때 친구였다. 아니, 내가 여기 다니는 걸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한 거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몇 년간 절친이었고 20대까지도 많이 어울렸으나, 최근 십 년 가까이 연락이 끊긴 친구였다.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연락이 끊겼던 건 아니라서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친구야, 나 여기 다니는 거 어떻게 알았니?"
"니 이름이 특이하잖아. 이름을 검색창에 쳐봤더니 어느 체육관 카페가 나오더라. 무슨 대회를 했다는 글하고 단체 사진이 있었는데 그 안에 네가 있는 거야."
십 년 전쯤, 특이한 내 이름 덕분에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났다. 나는 어디 가서 돈 떼먹고 도망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어릴 때 나는 보통의 여자아이들 같은 예쁜 이름을 갖고 싶었다. 은희, 수지, 영아, 지선이 같은. 그런데 내 이름은 평범하지 않은 데다가 세 글자 모두 받침이 들어가 부르기도 어려웠다. 내 이름을 밝혀야 할 때 한 번에 알아듣는 일이 거의 없어 몇 번씩 반복해야 하니 부끄럽고 불편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이름을 쓸 일이 거의 없다.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건 편안했다. 난 아직도 누군가에게 내 이름을 말해야 할 때 속으로 심호흡부터 한다. 한 번에 알아듣게 또박또박 크게 말하려고 애쓰지만, 나중에 상대방이 서면으로 내 이름을 적은 걸 보면 절반정도는 틀리게 적어 보낸다.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길 때, 마트에서 포인트를 적립할 때 어려운 내 이름 대신 남편이나 아이 이름을 썼다.
평생 살면서 나와 같은 이름을 고등학교 때 딱 한 명 만났다. 같은 입시학원에 다녔는데, 이름은 같으나 성이 달랐다. 그는 남성이었고, 성씨가 달랐다. 그 후로 내 이름을 만난 건 사람이 아닌 지명에서였다. 내 이름은 시인 윤동주 님이 태어난 곳의 지명이기도 하고, 어느 날 받은 택배 상자에 '○○경제로'라는 내 이름이 들어간 도로명 주소가 적혀온 적도 있다.
얼마 전에 필명을 '윤아람'으로 정한 내게 남편이 말했다.
"그 필명 보다 본명이 더 좋아."
"왜?"
"자기 이름 흔하지 않고 좋잖아. 내 이름은 너무 흔해서 별로야."
남편은 자신의 이름 '승현'이 너무 흔해서 싫다고 한다. 나는 그 이름이 흔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단번에 알 수 없어서 좋다고 느꼈었는데 말이다.
내 이름은 아빠가 지어주셨다고 한다. 내가 아들이기를 바랐던 엄마가 실망을 하자,
"이 아이는 커서 아들 몫 할 거야."
라며 집안 아들에게만 붙여주는 돌림자 '용'을 넣어 바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엄마한테 이 얘기를 듣고 보니 내 이름이 자랑스러웠다. 요즘 세상에 아들 몫 할 거라는 말이 우습지만, 아빠가 내 이름을 지을 때 그 '아들 몫'이라는 의미는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면 필명이 아닌 본명이 표기된다. 얼마전에 쓴 누수사고 관련 글이 오마이뉴스 메인에 떴는데, 내가 글 쓰는 걸 몰랐던 동생이 내 글을 봤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내 이름을 포털 검색창에 쳐보니 내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들이 나온다. 이젠 정말 어디 가서 돈 떼먹고 도망치긴 글렀다.
지금껏 살면서 누구 돈을 떼먹은 적은 없지만 떼인 적은 있다. 이십오 년쯤 전에 내 돈 떼먹은 김 모 씨가 혹시라도 내 글을 본다면 이자까지는 안 바랄 테니 원금만이라도 갚아주길 바란다. 내 이름은 윤용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