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미용실에 갔다. 무거워 보이던 머리를 가볍게 손질하고 흰머리를 가리는 염색도 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아주 조금 예뻐진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옷장을 뒤져 평소 잘 입지 않는 단정한 재킷을 꺼내 입어본다.
"엄마 좀 봐줘. 엄마 어때?"
"응, 예뻐."
딸아이의 영혼 없는 대꾸에 속아보기로 한다. 저녁을 건너뛰고, 자기 전에 마스크 팩도 했다.
다음 날은 연중 가장 신경 쓰이는 행사 중의 하나인 학부모 공개수업일이다. 단지 아이가 수업 듣는 모습을 보러 가는 것뿐인데, 소개팅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처럼 외모에 신경이 쓰였다. 초4인 막내를 낳은 건 내가 마흔 살 때, 딸아이의 친구들 엄마 중에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 혹시라도 엄마가 아니라 큰 이모처럼 보일까 봐 은근히 신경이 쓰이곤 한다.
공개수업이 시작되는 5교시 수업 시간에 맞춰 학교를 갔다. 나처럼 한껏 멋을 낸 엄마들이 교실 뒤편에 서 있었다. 나도 그 틈에 섞여 자리를 잡고 서서 내 아이의 뒷모습을 찾아본다. 아무리 아이들이 많아도 내 아이는 딱 눈에 띈다. 잠시 후 뒤를 돌아본 아이와 반갑게 눈인사를 했다.
수업 주제는 '친구의 고민을 듣고 상담해 주기'였다. 반 아이들 모두 자신의 고민을 종이에 적어 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이 그중 몇 개의 고민을 뽑아 모두에게 읽어줬다. 하나의 고민이 5명 정도의 조원에게 주어지면, 그 고민을 적은 친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지 앞으로 나가 발표했다.
발표를 할 때는 고민에 대해 공감한 뒤 자신의 경험이나 해결책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순서로 하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 바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었구나, 참 힘들겠구나' 같은 말로 공감을 해 주는 게 중요해."
발표를 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1:1로 대화하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런지 공감의 말은 건너뛰고, 해결책 찾기에 급급한 발표를 했다. 누가 누가 더 엉뚱한 해결책을 찾나 시합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금 고3인 아들이 생각났다. 아들도 지금 엉뚱한 발표를 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저 아이들처럼 말이 참 많았는데, 요즘에는 학교생활이나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 이런저런 질문을 해도 영혼 없는 짧은 대꾸만을 해준다. 그런 아들이 며칠 전에 내 앞에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눈 상황이 있었다.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학교에서 학습에 필요한 패드를 대여해 줬다. 당시 코로나 시기라 그런 정책이 있었는데, 이후 학년들에게는 패드를 대여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아이가 실수로 패드를 떨어트려 액정이 깨졌다. 아이가 학교 선생님께 여쭤보니, 일단 센터에 가서 수리를 받으면 보험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고 한다. 아이가 직접 집 근처 서비스센터를 찾아갔고, 20만 원 정도 드는 수리 비용을 그동안 모아둔 용돈으로 냈다.
수리를 받은 다음 날, 아이가 매우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보상 못 받는대요."
보상센터에 연락해 보니 지정된 센터에서 수리를 받아야만 보험 처리가 가능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세히 좀 알아보고 하지 그랬어?"
"알아보고 한 거예요. 선생님이 일단 센터에 가서 수리를 받으라고 하셔서 그렇게 한 건데, 나중에 다시 알아보니까 지정 센터에 갔어야 했다고 하시잖아요. 용돈 모아서 뭐 사려고 했는데, 그 돈 다 날렸어요."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교생활이나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 이런저런 질문을 해도 영혼 없는 짧은 대답만을 해주던 아들이었다. 주로 뭔가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살갑게 다가왔다. 전에 없이 이런 이야기들을 자세히 하는 건 수리비용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바라는 게 뭐야?"
"그냥 그렇다고요. 속상해서요."
나는 아차 싶었다. 많이 속상하겠다는 위로와 공감의 말 한마디를 해주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액정이 깨지지 않게 좀 조심하지 그랬냐, 수리 센터 가기 전에 확실히 좀 알아보지 그랬냐, 결국 그 수리 비용을 엄마한테 달라는 거냐' 같은 생각을 하며 아이를 탓했을 뿐, 아이의 속상한 감정에 공감해 주지 못했다.
조금 늦었지만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는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많이 속상하겠다. 학교 선생님은 왜 처음부터 확실히 알려주지 않은 걸까?"
"이 패드를 저희 학년만 받고 끝났거든요. 그래서 학교에도 정확한 매뉴얼이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조금 더 확인을 해보고 진행하자. 속상하지만 배운 거라고 생각하면 돼. 수리 비용은 엄마가 절반 대줄게."
"고맙습니다."
아이의 속상한 마음이 다소 풀어진 듯했다.
아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예전에는 엄마인 내게 모든 걸 털어놓던 아이가 입을 다물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 봤다. 그간 우리의 대화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이가 중학교 2, 3학년이었던 코로나 시기에 생활에 규칙이 없고 살이 찐 아이의 모습이 못마땅해 내가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이가 어떤 고민을 이야기하면 나는 공감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쓸데없이 뭘 그런 걸 고민해?"
"힘들어도 해야지. 남들도 다 해."
사춘기가 된 아이가 말수가 적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입을 닫게 한 건 나였다.
학부모 공개수업 시간 40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공감의 말,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많이 속상하겠다'와 같은 말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고민을 마치 자신의 고민처럼 진지하게 생각했고, 이런저런 해결책을 발표하고 싶어 끝없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이어서 발표하자며 수업을 끝마쳤다.
교실 문을 나서며 생각해 보니, 사춘기 아이들이 자신의 고민을 부모보다 친구에게 털어놓게 되는 건 친구가 그 일을 해결해 줘서가 아니라 그 일을 자신의 고민처럼 진지하게 생각해 주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아이의 고민을 들으면, 엄마로서 그 일을 해결해 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이 조급해지며 공감할 여유를 잃곤 했다.
생물학적 나이는 많지만, 젊은 엄마가 돼야겠다. 아이의 고민을 쓸데없다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젊은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