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집안 선산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1986년 봄,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벌써 40년이 다 돼가는 일이다. 아버지 기일에는 해마다 친정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몇 해 전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고 다 함께 산소를 찾아간다.
마침 날씨도 좋을 때라 소풍 가듯 음식을 싸들고 가서 잡초를 뽑고, 절을 했다. 산소 주변에 예쁘게 핀 제비꽃을 따서 내가 어릴 때 했던 것처럼 반지를 만들어 딸아이의 손가락에 끼워줬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엄마가 챙겨 온 과일과 떡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와 언니, 나, 남동생 부부와 아이들 일곱 명이 모여 시끌벅적했다. 고요한 산속에 홀로 계신 아버지가 그날만큼은 심심하지 않으셨을 것 같다.
언니 시댁 어르신의 묘를 이장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 납골당과 수목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언니가 납골당을 알아봤는데 층마다 금액이 다르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높을수록 비싸지는데, 납골당은 눈높이 정도의 위치가 가장 비싸고, 바닥이나 천장과 가까운 곳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집조차 빈부격차가 있다는 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수목장은 어때? 난 수목장이 괜찮을 것 같던데."
나는 평소 납골당이 아파트 같아 보였고, 죽어서까지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수목장은 나무뿌리 주위에 골분을 묻어주는 방법으로 내 육신이 다시 자연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좋아 보였다.
내가 납골당과 수목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건, 몇 해 전 시어머니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시댁을 갔더니 어머니가 영정 사진을 찍어 벽에 걸어두셨다. 뭐 하러 저런 사진을 벌써 찍었느냐는 남편의 말에 어머니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찍어둬야 너희들이 날 예쁘게 기억해 줄 거 아니니?"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평소 심장질환이 있으셨던 어머니는 자신에게 갑자기 죽음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두고, 진료받으러 다니시는 모 대학병원에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하셨다며 증서를 보여주셨다.
남편이 펄쩍 뛰었다.
"엄마는 자식이 없어? 절대 안 돼요."
"어차피 죽으면 태워질 몸인데, 좋은 일 하고 가면 좋잖아. 거기서 장례도 다 치러준다고 하고."
"아, 말도 안 돼. 꿈도 꾸지 마요."
어머니는 크게 고집을 부리지는 않으셨다.
"어차피 자식들 동의가 있어야 된대."
어머니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결심을 하셨다고 해도 우리는 동의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장례까지 치러준다고 하니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크셨던 건 아닌가 싶어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어머니는 말 나온 김에 두 분(시부모님)이 들어갈 납골당을 미리 알아보라고 하셨다. 가입해 두신 상조보험 증권도 건네주셨다. 우린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큰 지병이 있으신 것도 아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모실 자리를 미리 알아본다는 게 잘하는 일인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구체적으로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납골당보다는 수목장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친정 가족들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놀다 오듯이 그렇게 바람 쐬러 가듯, 소풍 가듯 가 볼 수 있는 장소로 모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주에 우연히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게 됐는데, 거기서 방송인 강주은 씨가 아버지와 함께 장지를 보러 다니는 장면이 나왔다. 강주은 씨의 아버지는 캐나다에 사시면서 이미 오래전에 장지를 마련해 두셨는데, 캐나다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었을 때 장지를 사놓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젊었을 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꺼리는데, 캐나다에서는 오히려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문화라고 한다.
강주은 씨가 부모님과 자연스럽게 장지를 상의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고, 부모님은 이제 떠날 준비를 다 했으니 남은 생을 편안하게 즐기면 된다고 하시는 게 너무 멋있어 보였다.
방송에는 내가 궁금했던 수목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나왔는데, 역시나 여기에도 얼마나 넓은 공간인지에 따라 금액 차이가 많이 났다. 아무런 준비 없이 상을 당하게 된다면, 슬픈 가운데서도 돈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자식으로서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장지를 미리 알아보라고 하신 건 이런 상황을 걱정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 말씀을 듣는 게 걱정 한 가지를 덜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부모님과 의논을 해보고 장지를 마련해야겠다.
준비하는 김에 그 옆에 남편과 내가 쉴 곳도 함께 마련할 생각이다.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게 현실로 다가오면, 현재를 더 열심히 살게 될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을 글로 쓰다 보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가장 후회할 일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한 것도 죄송하지만, 무엇보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될 것 같다.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한 번이라도 더 보여드려야겠다. 우리(나, 남편, 세 아이들)가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