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에 시부모님이 농사지은 땅콩을 가져가라고 하셨다. 겉껍질을 까지 않은 땅콩이었다. 난 그걸 가져가면 어딘가 처박아 뒀다가 곰팡이가 끼기 시작하면 내다 버릴게 뻔했다. 밥을 먹고 나서 모두 모여 앉아 티브이를 볼 때 남편과 아이들 앞에 땅콩을 꺼내 놓으며 말했다.
"껍질 까서 가져 가자."
처음에는 손으로 까다가 다들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자, 남편이 아령 같은 걸 가져와서 껍질을 깨 놓으면 딸아이가 땅콩을 꺼내 그릇에 넣었다. 시간이 갈수록 손이 빨라지고 분업화된 공장 같은 느낌이었다. 혼자라면 절대 하기 싫을 일을 모여서 하니 재미있었다.
이제 고구마를 캘 때가 되었다는 게 생각났다.
"어머니, 고구마는 언제 캐요?"
"10월은 돼야지."
"고구마 캘 때 부르세요. 막내 데리고 올게요."
난 잊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잊지 않고 전화를 하셨다.
"이번 주말에 고구마 캐러 올래?"
막상 가려니까 쪼오금 귀찮았지만, 남들은 돈 내고 하는 시골 체험을 우리는 공짜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갈게요. 고기 사가지고 갈게요."
막내딸(초4)한테 같이 가고 싶은 친구 있으면 데려가도 좋다고 했더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친구의 언니(초6)를 초대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 바비큐 해 먹을 돼지갈비와 과일을 사서 시댁이 있는 파주로 향했다.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 이랑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열심히 땅을 파는데 한동안 고구마가 나오지 않고 두더지가 먹다 만 썩은 고구마만 나왔다. 한참만에 고구마 발견, 마치 금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살살 달래듯 흔들다가 쓱 당겨 뽑았다. 어떤 고구마는 땅 속 깊이 단단하게 박혀서 뽑다가 부러져 버리기도 했다. 그럴 땐 너무 속상해서 나도 모르게 "아이씨"라고 소리쳤다.
"엄마야~"
저쪽에서 딸아이의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벌레야 벌레, 나 벌레 너무 싫어."
손톱보다 작은 벌레를 보고 호들갑을 떠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벌레는 땅이 건강하다는 증거야. 자세히 보면 하나도 안 무서워. 오히려 벌레들이 널 무서워할걸."
땅을 파다 보니 정말 다양한 종류의 벌레들이 그 안에 살고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아이들은 낄낄 거리며 땅을 파고 자신이 캔 고구마를 자랑하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두어 시간쯤 고구마를 캐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몸이 잘 펴지지 않았다.
"아이고야. 농사는 역시 힘들어."
남편이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자기야, 이거 먹어봐. 갈비가 예술이야."
아이들은 마당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를 따 먹으며 대추가 사과보다 맛있다고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대추를 하나 따 입에 넣었다.
"아니, 대추에 설탕을 뿌렸나?"
남편이 예술로 구운 고기에, 시어머니가 맛깔나게 무친 나물 반찬에, 시원한 맥주까지 한 잔 마시고 나머지 고구마를 캤다. 한 시간쯤 지나 고구마를 다 캐갈 때쯤 빗방울이 떨어졌다. 남편이 고구마를 손수레에 실어다가 집 앞 비닐하우스 안에 집어넣었다. 젖은 흙을 잘 말려야 썩지 않게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온몸이 쑤신다. 고작 세 시간 고구마 캔다고 쪼그려 앉아 호미질을 한 것뿐인데... 그동안 고구마를 먹다가 싹이 나면 맛이 없어 보여서 버리기도 했다. 이번에 가져온 고구마는 하나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튀겨 먹어야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구마는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고구마다. 우리 집 에어프라이어는 일 년 내내 자리만 차지하고 거의 놀고 있다가 집에 고구마가 들어온 이후부터 제대로 일을 한다. 오늘 오랜만에 일을 시켰는데, 에어프라이어가 조금 돌아가다가 꺼져 버렸다. 왜 심통을 부리시나, 하고 문을 열어보니 문이 아래로 떨어진다. 연결 나사가 부러져 버렸다. 망했다!!
고구마를 굽기 위해 에어프라이어를 새로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삶아 먹기로 했다. 사실, 수분을 날리고 단맛을 극대화한 구운 고구마보다는 삶은 고구마가 당지수가 낮아 다이어트에는 더 좋다고 하지 않던가. 올 가을에는 다이어트를 위해 고구마를 삶아 먹기로 했다.
다이어트한다고 밥 대신 고구마를 먹었다. 원래 삶은 고구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 고구마는 삶아도 맛있다. 점심으로 팔뚝만 한(누구 팔뚝?) 고구마 두 개를 해치웠다. 추석이 지나면 다이어트하려고 했다가 10월이 되면 하려고 했는데 고구마가 너무 맛있어서 다음 달로 미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