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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Sep 14. 2022

발걸음이 느려졌다


매일 점심시간 12시가 되면 사무실 앞 아파트 단지 둘레 산책길을 걷고 있다.

8월 초가 되어 볕이 뜨거워지자, 원래 다니던 코스에서 그늘이 없는 곳은 가지 않고 그늘로만 다니면서 같은 길을 두 번 정도 왕복하는 식으로 산책을 했다.


그즈음에 어떤 아주머니가 나와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분은 나와 반대방향에서 출발하시는지 왔다 갔다 하면서 마주치곤 했다.

그분이 산책길에 나타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옷을 보고 같은 분이라는 걸 알았고, 일주일쯤 더 지나자 얼굴이 익숙해졌다.


어느새 그분이 내 옆을 지나가면 힐끗 쳐다보게 되었고, 그분도 나를 힐끗 쳐다보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무언의 눈인사라고 생각했다.

선캡을 쓰고 운동화를 신었지만 옷은 운동복이 아닌 꽃무늬 블라우스를 자주 입으시는 걸 보면 아파트 주민은 아니신 것 같고, 나처럼 이 부근에 출근을 하여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시는 분인 것 같았다.

늘 아주머니 특유의 파워워킹으로 활기차게 걸으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산책길이 거듭될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발걸음은 느려지는 중이었는데, 그분을 따라 나도 좀 빨리 걸어볼까 하다가 생각했다.

나의 산책이 사색을 위한 것인가, 운동을 위한 것인가.

나는 사색을 선택했다.

산책길은 계속 느리게 걷는 걸로~


8월 셋째 주 어느 날, 그날도 햇볕이 뜨거웠다.

산책길 옆 놀이터 그네에 그분이 앉아 계셨다.

그늘이 있는 곳도 있었는데, 굳이 그늘이 없는 쪽에 앉아 계셨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그네 옆에 두었고, 티셔츠와 바지단을 걷어 올리고, 손은 벌을 서듯 최대한 올려 그넷줄을 잡고 벽 쪽을 보고 땡볕 아래 덩그러니.

그냥 앉아 있다고 하기엔 그네가 계속 움직였고, 그네를 탄다고 하기엔 그 움직임이 너무 적었다.


내가 두 번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그분은 계속 그렇게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뒷모습이 슬퍼 보였다.

'옛 생각이 나서 그네를 타고 계신 걸까? 가서 좀 밀어드릴까요 물어볼까?'

'뭔가 슬픈 일이 있어 울고 계신 건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지만 다가가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몇 번을 돌아보다가 지나쳐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아주머니가 산책길에 나오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 두신 걸까?

그늘에서도 선캡을 눌러쓰고 운동을 하시던 분이 무더운 여름날 땡볕 아래 그토록 오래 앉아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때 한 번만 다가가서 물어볼 것을.


몇 달간의 산책길에 가끔 나를 미소 짓게 했던 것은 나무와 꽃, 새들 그리고 사람들이었다.

하교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다정하게 혹은 무뚝뚝하게 걸어가는 엄마와 딸의 모습, 정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년의 부부, 그리고 씩씩한 파워워킹을 하시던 그 아주머니.

매일 반복되며 익숙했던 모습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쓸쓸함이 남았다.


오늘도 산책길에는 아주머니가 없다.

어느덧, 더위가 물러간 나의 산책길엔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듯하다.

늘 다니던 그 길이 오늘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져 돌아올 때는 다른 길을 택해서 돌아왔다.

다른 길에서 뜻밖의 예쁜 꽃길을 만났다.

나의 발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아주머니도 어딘가에서 꽃길을 걷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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