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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Sep 22. 2022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들으며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아침에 전철에서 내려 길을 걷는데 라디오에서 나온 아름다운 노랫말이 내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같은 노래가 저녁 퇴근길 지하철을 내려 걸을 때 라디오에서 또 흘러나왔다.

노래 제목은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란 가사가 나올 때 막내딸의 웃음이 떠올랐다.

너무 큰 지우개를 사는 바람에 필통에 안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며 까르르까르르, 컵라면 먹으려고 젓가락을 반으로 갈랐는데 비뚤게 갈라진 모습을 보고도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꽃이 예쁘다 한들, 나무가 푸르다 한들 아이의 해맑은 웃음만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이 생각에 미소 짓다가 나를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렇게 감추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이 넘치던 날들이 있었는데, 언제 사라져 버렸지?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단체로 벌을 서고 매를 맞아야 했을 때?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라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웃으면서 눈치를 보기 시작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나만 웃는 것은 아닌지, 웃어도 되는 상황인 건지 남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을 때.


어느 순간부터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직장 상사 앞에서, 고객들 앞에서, 동네 엄마들 앞에서, 때로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도.

지금은 나의 뇌가 웃는 것을 '노동'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생각해 보니 성인이 된 이후에 아이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이 있기는 했다.

소주 2병, 맥주 5병 정도 마셨을 때다.

나의 뇌를 순수하게 만들어줬던 알코올의 힘!


혹시,
사라진 게 아니라
내 안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노인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 실습을 할 때 거기 계신 어르신들의 웃음에서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분들의 웃음은 순수하고 해맑았다.

물론 모든 분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늘 화가 나 있는 분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처럼 웃을 수 있는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은 어른이 되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게 된다.

젊은 시절 수많은 욕망과 욕심이 가득할 때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술에 취해 뇌가 순수해지면 끌려 나오기도 함)

그러다가 노인이 되어 마음속 욕심이 점차 사라지면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지만,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의 '해맑은 웃음'은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욕망 :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하게 바람.
욕심 : 어떠한 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삶에서 적당한 '욕망'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욕망이 지나치면 '욕심'이 된다. 내가 바라는 것이 '욕망'인 건지, '욕심'인 건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꿈꾸는 모든 것들이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날이 올까 봐 조금은 겁이 난다.


욕망이라고 믿었던 욕심의 무게를 버틸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순순히 버릴 수 있게 되기를, 그래서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은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는 것


수많은 여름과 겨울을 거쳐 다시 찾아온 어느 가을날,

아름답게 늙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을 누군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함께 듣고 싶다.



https://youtu.be/cCyJNklLa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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