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아 사무실 창문을 열어놓고 일을 하는데 창밖에서 기분 좋은 아이들 함성 소리가 들렸다. 길 건너 초등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모여 앉아있고, 트랙을 따라 달리는 아이들도 몇 명 보인다.
'아, 운동회 하나 보다.'
오랜만에 학교가 시끌시끌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1980년대에 비하면 그냥 아이들 노는 수준이다.
1980년대에는 가을운동회가 마을 축제였다. 엄마가 김밥을 싸는 날은 1년에 두 번, 봄소풍과 가을운동회 날이었다. 나 혼자 가는 봄소풍과 달리 가을 운동회 날은 온 가족에 이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함께 했고, 학교 앞은 솜사탕과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축제가 따로 없었다.
운동회는 '국민체조 시~작'이라는 구령과 함께 나오는 음악으로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 음악이 나오면 몸이 자동 반사할 것이다. 월요일 아침 조회마다 지겹게 했던 국민체조를 하고는 청군과 백군을 갈라 구령대 양쪽으로 나누어 앉았다. 모두 똑같은 흰색 체육복을 입은 가운데 청군과 백군을 구별하는 방법은 모자와 머리띠였다. 한 면은 흰색, 한 면은 파란색으로 된 모자나 머리띠를 착용했다. 홀수반은 청군, 짝수반은 백군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운동회날만큼은 색깔이 다른 친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게 당시의 국룰이었다.
오전에는 100m 달리기 개인전을 하였다. 1,2,3등 까지는 손목에 도장을 찍어주었는데 그 도장이 있으면 공책이나 연필을 경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달리기를 잘했던 나는 늘 '1'이라는 숫자를 손목에 새길 수 있었고 팀 대항 계주에도 반 대표로 나가 달렸다. 아, 생각해 보니 나 달리기 잘하는 아이였네. 하하
운동회 한 달쯤 전부터는 각 학년별로 꼭두각시춤, 부채춤 등의 단체 공연을 준비했다. 저학년 때는 귀여운 꼭두각시 춤을, 고학년 때는 고도의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부채춤을 공연했다. 가방 안에는 책 대신 대나무에 분홍색 천을 덧대고 끝에는 하얀 깃털이 달린 부채를 가지고 다녔다. 남자아이들은 기마전을 했었던가. 어쨌든 다른 공연을 했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이 연습할 때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에 쪼그려 앉아 공기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 햇살이 따가운 운동장에서 몇 시간씩 연습을 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공부보다는 훨~씬 즐거웠다.
부채춤 연습할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부채춤의 백미는 여럿이 둥글게 겹쳐 모여 꽃송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양손에 든 부채를 쫙 펼쳐 이어 붙인 다음 가장 바깥쪽 아이들은 쪼그려 앉고 안쪽으로 갈수록 몸을 조금씩 들어 여러 겹의 꽃잎 모양을 만드는데 가운데 한 명만 서서 꽃술이 되어 부채를 들고 빙빙 돌게 된다. 가운데 한 명이 마치 주인공 같아 그 자리에 서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 가장 바깥쪽 꽃잎이 되었다는 웃픈 기억.
점심시간이 되면 각자의 부모님을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 먼지 폴폴 날리는 운동장에 앉아 별 거 안 들어간 김밥과 탄산음료, 과일 등을 먹는 게 전부였지만 가족 간의 정이 가득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후에는 단체로 하는 경기로 줄다리기, 박 터트리기, 이인삼각, 공 굴리기 등을 했다. 박 터트리기를 위해 집에서 헌 양말에 쌀이나 콩을 넣고 오자미를 만들어 가야 했는데 많이 만들려는 욕심에 멀쩡한 양말을 잘랐다가 부모님한테 혼나기도 했다.
제법 커다란 경품이 걸린 것이 부모님 달리기 경기였다. 이때 꼭 의욕이 앞서 달리다가 넘어지는 분들이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지기 싫었겠지만 넘어지는 것도 만만치 않게 창피하셨을 텐데 집에 가서 어떻게 수습하셨을까 부모 입장이 되고 보니 궁금해진다.
뭐니 뭐니 해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각 팀의 사활이 걸린 이어달리기. 이어달리기를 할 때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모두들 선수가 되어 함께 달리는 심정으로 응원을 했다. 이어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턴을 잘 전달받는 것이다. 실수로 떨어트려 상대팀에게 추월이라도 당하게 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 팀의 야유와 상대 팀의 환호 속에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울어야 했다. 뭐, 내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하하
경기만큼이나 치열했던 것이 응원전이었다. 운동회가 끝나고 나면 다리보다 목이 아플 정도였다. 각 학급 오락부장들이 앞에 나와 응원을 주도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따르릉따르릉 전화 왔어요~ 백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거짓말 청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그러면 상대 팀에서 백군 청군을 바꾸어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여러 가지 만화 주제가들을 개사해서 응원송을 만들기도 했고 문구점에서 꽃술을 사서 흔들기도 했다. 이 꽃술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서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가닥가닥 열심히 찢었고 친구들과 율동을 만들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순간 창문 밖 함성 소리가 잠잠해졌다. 운동장이 텅 비었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다. 다들 급식을 먹으러 교실로 들어갔나 보다. 나도 사무실을 나와 산책을 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 내가 부모님, 언니, 동생과 모여 앉아 엄마의 정성이 담긴 김밥과 평소 못 먹는 환타를 병나발 불며 즐거워하고 있던 1980년대 가을 운동회 날, 홀로 구석진 자리를 찾아 초라한 도시락 뚜껑을 열거나 수돗물만 벌컥벌컥 마셔대는 친구는 없었을까? 모두들 한바탕 즐거운 축제날이 누군가에게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을까? 햇살에 반짝이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그늘이 자꾸 신경 쓰이는 걸 보면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가 보다.
주말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동 언덕 그리운 초등학교 운동장에 한번 가봐야겠다. 운동회날 부모님과의 약속 장소였던 커다란 은행나무는 아직도 있을까? 2년마다 한번 하던 작은 운동회마저 코로나로 사라진 이후 입학을 해 운동회가 뭔지도 모르는 막내딸에게 엄마의 가을 운동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