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것들

늦가을의 곶감

by 감성마루

배태, 경남 양산 원동면 영포리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배태고개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고개를 넘나들던 나그네가 쉬어가던 주막이 있던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주말마다 찾는 시골집과 텃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굽이진 골짜기를 돌아 차도와 이어진 좁은 소로를 따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농촌 마을이다. 이십여 년 전 남편 친구의 소개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마을 길 한 모퉁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아담한 정자는 한때 마을 어른들의 사랑방이었다. 열어젖힌 문을 통해 마을을 오가는 이들과 안부를 주고받고 제철 음식을 함께 먹으며 정을 나누었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사십 대였던 우리 부부는 이제 이순을 넘겼다. 그 시절 어른들은 하나둘 떠나갔고 주인 잃은 정자만이 그들을 추억하며 쓸쓸히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빈집은 점차 늘어갔고 넘쳐나던 웃음소리와 바람에 섞여 들려오던 말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주인의 손길을 잃은 밭에는 사방으로 헝클어진 매실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란 칡넝쿨과 뒤엉켜 작은 숲으로 변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깊어 가는 가을 하늘을 향해 햇빛 머금은 주홍색 감을 매단 채 묵묵히 마을을 지키고 있는 감나무들이었다.


우리 집 옆 하천 부지에도 한 그루의 감나무가 우리보다 먼저 터를 잡고 있었다.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아 화가 난 듯 떫은맛을 잔뜩 머금은 땡감나무였다. 소리 없이 묵묵히 자랐고 해마다 감의 풍성함은 더해갔다. 감나무를 한동안 응시하던 남편이 대뜸 “곶감 한번 만들어 볼까?”라며 읊조렸다. 늦가을 시골의 여유로움이 우리 부부를 감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감을 따고 텔레비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장단 맞춰 껍질을 깎아 처마 밑에 매달았다.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자태가 가을을 담은 풍경화의 일부가 되었다.


퇴직 후 비로소 나는 내려놓는 삶을 배우고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의 바다에서 나만의 속도로 헤엄치는 법도 하나씩 익혀가는 중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것도 앞서 떠나간 인연들을 간간이 떠올리거나 마당에 나뒹구는 낙엽을 치우는 등 새로운 일거리를 만나는 것도 느린 시간이 준 선물이다. 곶감 만들기는 그 속에서 찾아낸 일거리 중 하나다.


다가오는 주말이면 시골집 처마 아래 매달린 감을 만나러 올 것이다.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직접 만든 곶감에 곁들인 녹차 한 잔을 떠올리며 훈훈한 겨울을 보낼 상상으로 가득하다. 동화 속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곶감에 마음속에서 이는 말을 조용히 건네 본다. 겨울의 냉기를 견디며 익어갈 너처럼 우리도 그렇게 익어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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