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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션펌킨 Dec 11. 2021

엄마

우리는 친한 모녀가 아니었다.

엄마와 단 둘이 하는 산행이 몇 번 반복되고 보니 엄마를 더 이해하게 되는 것도 생기고 한편으론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도 생겼다. 두어 번 같이 산행한 후론 다시는 엄마와 산행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약해져서 엄마가 가자고 하면 따라나서기를 몇 번 하고 보니 내가 엄마를 맞추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디테일하지도 않고 다감하지도 않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물론 자식과 남편에게 받은 엄마의 상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엄마'라고 하면 따뜻함이나 애틋함이라는 고정된 프레임을 씌워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런 오류를 범했고 지금도 부지불식간에 "엄마가 왜 그래?"라는 소리를 내뱉기도 한다. 엄마에게 희생의 프레임을 쓰워놓고 그렇지 못한 엄마들은 모두 나쁜 엄마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사회 분위기에 나조차 휩쓸려 갈 때가 태반이다. 

내가 중년이 되었고 삶의 고단함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 후에는 엄마를 나와 같은 여자로 보는 일이 자주 생겼다. 엄마도 힘들었겠구나... 나라면 그러지 못했을 일들을 엄마는 다 견뎌내고 해냈고 버텼구나... 지금 엄마의 모습은 그 모든 것들을 통과한 모습이구나... 라며 내면 깊이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과천 향교의 우측 산행로를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사당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지는 부분이 있다. 이 벙커가 그 기점에 있는데 지나쳐 버리기가 일쑤다. 이 기점을 기억하자. 

2남 6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나 딸 중에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던 엄마였다고 한다. 그 시절은 내가 세상에 없었으니 증언은 불가하다. 하지만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그럼직하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과 남매들이 북적이며 살았을 것이고 딸이 많았으니 형제들과는 또 다른 자매들 사이의 치열함도 있었겠다.  엄마는 웃음이 많고 마음이 여리다. 그런 엄마가 5남 1녀의 맏이에게 시집을 왔고 권위적이고 고지식한 남편에게 맞추며 사느라 가슴 답답한 일이 많았을 것이다. 

어릴 적 들었던 말 중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엄마의 말이 있다.

"샤워하고 목욕탕에서 옷 안 입고 그냥 나와보는 게 소원이었다."라는 말이다. 

소박하다 못해 웃픈 엄마의 그 한마디가 그간 엄마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를 단번에 예측할 수 있게 한다. 

둘 다 시골이 고향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해서 만나 결혼을 했지만 단칸방에 신간 살림을 차리자마자 시동생들이 줄줄이 올라와 함께 살았다. 어렵게 살림을 늘려 나갔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 시동생들 결혼과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치러냈어야 했으니 오롯이 엄마만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벙커 옆에 나 있는 길인데 아래서 올려다보면 길이라고 인식하기 어렵다. 능선의 일부로 보이기 때문에 연주대에서 내려오다 보면 이 길을 못 보고 지나치기 쉽다. 

오해가 생길지 몰라 첨언을 하자면 이 글은 철저히 엄마의 관점에서 쓰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1년 넘게 백수생활을 하면서 칩거를 하다 보니 엄마의 생활 패턴이 보였고 그로 인해 나의 무심함이 깨달아졌기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엄마 입장이 되어 보기로 한 것이다. 

연주대에서 사당으로 하산하다가 과천향교로 하산 지점을 변경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길도 엄마가 알려 주셔서 아주 좋은 팁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찍 일어나서 바쁘게 아침을 먹고 제일 먼저 집을 나서고 제일 늦게 집에 들어오는 딸이었다.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러 일들을 실패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아서 다시 나를 추스르고자 하는 시점에 주변을 돌아보니 엄마의 눈가에 주름이 깊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처음엔 원망이 컸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늘 낳아 달라고 하지도 않은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들 고생시키는 부모들을 혐오했다. 못나게도 뜻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내 인생에 대한 원망을 부모에게 한 것이었다. 정말 못났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나는 노력한 것에 비해 재주가 많았고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잘 될 줄만 알았다. 열정도 있었고 체력도 좋았다. 감각도 남달라서 같은 학년 아이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것들이 많았다. 전교 1등 하는 친구가 하나도 부럽지 않을 만큼 공부 말고도 잘하는 것이 많았다. 

사당역 방향으로 하산하다 보면 볼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의 우측 위에 벙커가 있고 그 벙커 옆에 보이는 능선이 곧 길이다. 다음에 꼭 다시 가 볼 것.

하지만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내가 가진 재주를 부담스러워했다. 공부 잘해서 공부로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나는 공부 말고 더 잘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차암 좋았던 부녀 관계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고등학교 이후부터 나는 아빠뿐 아니라 가족들과 대화를 깊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앞에 놓인 커다란 인생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사춘기를 보냈던 것이다. 답이 없는 질문들은 늘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되었다. 왜 낳았을까...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만들었을까... 그러다 보면 엄마에 대한 원망이 더 커졌다. 아빠 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엄마가 미워지기도 했다. 둘이 한 편이 되어서 나와 대척점에 서 있으니 나는 늘 2대 1로 싸워야 하는 불리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날 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춘기는 중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독신도 비혼도 선택한 적 없다. 단지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 인생 하나도 책임지지 못해 이렇게 망쳐놓았는데 감히 타인의 인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여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독립적인 가치관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면 어떤 좋은 조건을 가졌더라도 칼같이 돌아섰다. 홀로 서지 못한 내가 나보다 더 홀로 서지 못한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것은 폭탄을 안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같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냉철한 잣대를 들이댔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본인 명의의 아파트와 중형차가 있고 정년까지 할 수 있는 직장이 있는 사람이라며 소개를 받는다. 하지만 만나 봤을 때 남녀 역할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늦은 나이에 만났으니 빨리 식을 올리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럼, 내가... 애를 낳아주기 위해 그 시점에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뭐지?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함께 할 미래가 긍정적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접근하는 방식부터가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은 끝도 정해져 있다. 그러면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와 가치관이 맞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미루고 미루다 보니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생물학적으로 정말 결혼하기 좋은 시절-사회적 관점에서 가임기를 뜻하겠지?-을 헛헛하게 보내버렸다. 

그 후 결혼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나는 늘 화살을 부모님에게 돌렸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 한 명의 인생이라도 불행하게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말이다.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인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했다. 엄마도 나를 낳고 키우는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들어 알고 있다. 완벽주의가 강한 권위적인 아빠와 살아 내는 것도 버거웠을 수도 있다. 엄마도 엄마 인생 오롯이 살아 내기가 벅찼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려 애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을 찾아서 항상 눈을 외부로 향해 놓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파랑새를 쫒는 사람처럼 말이다. 현실도피를 위해 나는 늘 꿈을 찾겠다며 밖으로만 돌았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그랬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게 밖으로만 돌던 탕자가 몸이 쇠약해지고 모든 일에 실패를 하고 나니 갈 곳이 없더라.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칩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나를 배려해 주던 엄마도 조금씩 불편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무런 리액션도 하지 않았다. 소리를 보내면 메아리가 와야 하는데 죽은 듯 있는 내가 버거웠을 엄마다. 사춘기 때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마흔 넘은 딸이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저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끝까지 모른 척해 주기를 바랐다. 

새벽부터 비가 와서 산 중턱부터 안개가 자욱했다. 발 앞이 뿌옇게 보여서 걸음을 떼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정상에 와 보니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칩거의 시간이 길어지고 불안한 마음은 엄마가 더 커진 듯했다. 그러면서 한 번 아주 크게 부딪히는 일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대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고요!!!"

엄마 아빠는 전쟁같이 싸우고도 식사는 빼놓지 않고 챙기는 부부다. 나와 그렇게 부딪힌 날도 엄마는 여느 날과 같이 식사 준비를 했고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고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때 아빠가 중재에 나섰다. 처음이었다. 조용히 나를 부르던 아빠. 

혼날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는 무서웠고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는 그렇게 혼날 일도 없었지만 혼을 내려해도 내가 분위기에 지지 않고 맞섰던 때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아빠도 가능하면 맞대면하기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은 좀 달랐다. 내가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려 소리친 말이 아마 부모님에게 큰 충격이었을까? 

"지금 엄마랑 싸운 거니?"

"아니요, 대화한 건데요."

"싸운 게 아니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와 싸우는 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자식과 부모가 싸운다는 것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엄마가 너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엄마와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알아듣겠니?"

무척 차분한 어조였고 아빠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아차!' 싶었다. 

그날 후로, 나 역시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분노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성실하게 잘 살아온 부모님인데 나는 어디서부터 꼬여 있는 것일까? 코로나로 인해 외부 자극을 많이 줄일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를 들여다보는 방법이 산행이었다. 그렇게 나의 산타기가 시작되었다. 

집을 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만만한 곳이 산이었다. 젊은 시절, 한창때 호기롭게 산을 탔던 경험이 있어 두렵지는 않았다. 적정한 날씨도 도움을 주니 더 활발하게 산행을 할 수 있었다. 맛있는 간식을 배낭에 넣고 집 가까운 산에 올라 아는 동네를 내려다보는 기분도 좋았다. 

오르면서, 쉬면서, 내려오면서 혼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작정하고 하지 않아도 연못 속 부유물이 떠오른 듯 떠올랐다가 샘물 한 가닥이 올라와 흐린 물을 깨끗하게 하듯이 정리가 되기도 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답이 없이 계속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산행이 좋은 점은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즈음엔 산행의 피로감 때문에 몸이 힘들어져서 생각을 접고 몸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 잠시라도 복잡한 생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날, 몸이 회복되고 나면 처음보다는 정돈된 생각이 보이기도 했다. 그 신기한 경험을 올 한 해 산행을 하면서 여러 번 다이내믹하게 했다. 그러면서 이젠 정말 산을 즐기는 방향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경험이 많은 엄마도 나와 산을 타자고 다가오고 그렇게 둘이 같이 산을 타면서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씩 서로를 더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산을 타는 성향도 반대다. 엄마는 완만한 경사를 길게 꾸준히 타는 것을 좋아한다. 급격한 경사는 무릎에 무리가 가고 내려와서 발목이 아프기 때문이다. 한창때는 남한의 "악"산은 즐겼다. 아빠와 함께 속도를 맞춰가며 전국 명산을 타러 부지런히 다녔었다. 내가 고3일 때도, 재수를 할 때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곁에서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점이 더 좋았다. 부담스럽지 않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부모님이 건강을 위해 공들였던 그 시간들에는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회복되는 기간이 길어지며 그 의기양양했던 기세가 꺾이고 몇 년 전부터는 아빠와 함께 하는 산행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아주 현실적인 선택으로 서로의 속도로 가면서 중간중간 접점을 만들어 함께 여행을 꾸준히 하며 별일 없이 지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촛불. 그 불이 바람에 나부끼며 꺼지지 않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늘 아빠의 승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 상처를 받는 것도 아빠였다. 그래서 나는 더 답답했다. 득이 없는 싸움을 하고 상처를 주고 회복도 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보면 그 또한 인생이었다. 그 안에서 각자 나름대로 성찰하고 성장했으니 말이다. 

부모님이 원하는 자식이 되지는 못했어도 내가 두 분의 딸인 것처럼, 내가 원하는 부모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두 분은 분명 내 부모다. 그리고 지금은 큰 성공이나 급변하는 발전을 해낸 것은 없지만 시나브로 건강에 힘쓰며 꾸준하게 성실히 살아온 그 자세 자체만으로도 내 부모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본다. 

여전히 엄마와의 대화가 답답할 때가 있고 눈앞에 보이는 알림 안내문을 읽지 않아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슈를 처리하는 모습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산행하면서 당신의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전수해 주려고 하고 이것저것 가르쳐 주려고 하는 모습을 귀찮아하지 않기로 했다. 

다짐은 하지만 그 또한 실천은 어렵다. 두 번 세 번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갈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저도 참아야 한다고 마음은 먹어 본다.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찍어 보았다. 

엄마와 나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산을 타는 아빠를 하산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출발선부터 다르고 산행 코스도 우리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아빠는 언제부턴가 혼자 하는 산행을 더 만족스러워했다. 할아버지는 직장암,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각각 수년간의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당신의 건강을 지켜 자식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표명했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빠가 버거워하는 엄마를 이끌고 산행을 시작했던 시기가. 20년이 지난 지금 엄마도 그 선택을 고마워하고 있고 나 역시도 오히려 빚진 기분이다. 그래서 그 시작의 이유는 달랐지만 나도 나를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 어려운 산행을 꾸준히 하려고 한다. 그리고 틈틈이 엄마 아빠의 노하우를 배우려고 애쓰고 있다. 

높은 탑은 볼 때마다 사진을 찍게된다. 날씬해 보이게 찍어달라는 엄마의 주문에 따라 잘 찍어 보았다.

엄마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씩 옛 사진들 들여다보며 추억에 잠겨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어딜 가든 사진 남기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하지만 가족인 우리는 좀 피곤할 때가 있다.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해서 원하는 장소에 서면 웃어라, 입이 크면 안 예쁘다,  크게 웃지 말아라, 뚱뚱해 보이지 않게 옆으로 서라, 다리를 벌리지 말아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등의 주문이 너무 많다. 당신 눈에 예뻐 보이기 전까지 끊임없이 주문을 하는데, 듣다 보면 내 자존감이 상처를 받는 것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그 모습을 찍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형식을 갖추고 예뻐 보이려고 하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외모에 지대한 신경을 썼고 딸에게도 잔소리가 심했다. 그래서 나는 역으로 더 털털하게 하고 다니게 되었고 일부러 남자 같은 옷을 입었다. 그러다 보니 편하고 좋았고 그게 내 성격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아빠가 엄마랑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던 이유를 이번에 정확하게 공감했다. 모발의 양도 줄고 흰머리가 대부분인 아빠에게 사진 한 번 찍으려면 수십 가지 주문을 할 것이다. 처음엔 들어주었겠지만 나중엔 지친다. 원래 이렇게 생긴 사람을 보고 뭘 어쩌라는 것인가 하는 반감이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사진 찍기가 더 싫어진다. 

호압사 앞 마당을 지키는 수호신. 벗나무가 정말 멋지다. 

이런 엄마에게 문득문득 욱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이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엄마의 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을 찍을 때는 나와 아빠를 괴롭힌다는 것을 엄마는 모른다. 나 자신도 들여다보기 싫은 내 외모를 지적하면서 가려보라고 요구한다. 가족이지만 선을 넘는 거지.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미움을 산다. 하지만 그 조차도 인정하기로 했다. 엄마니까. 내 엄마니까 말이다. 

아빠와 만나기로 했던 호압사에서 잠시 쉬었다가 우리는 석수역 방향으로 하산길을 정했다. 걸으면서 산행하며 있던 일들을 두런두런 나누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안개 자욱한 산꼭대기가 무섭다며 걱정하던 엄마가 아빠가 호압사에서 만나자고 하는 메시지를 보고 아주 빠르게 하산을 했던 것이 떠오르며 역시 엄마는 아빠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화를 하다 보가 버럭 화를 내며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 다툼으로 끝나지만 그래도 다음 날이면 아빠를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마음은 요식행위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자녀에게 표현방법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도 감정 표현의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래도 나는 힘들었지만 건강하게 자랐다. 성인이 되어 어른 아이를 다룰 줄 몰라 당황했던 시기가 길었지만 반사회적 인간으로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건강한 인격의 토양은 만들어 주었다. 

중년이 된 딸이 칠순이 되어 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이제는 우리 좀 친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 조금 친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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