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발자 모드 속 마흔 번째 이야기
10년 전 바움가트너의 아내 애나는 바다에서 사고로 죽었다. 그는 아내의 부재를 극복한 것처럼 지냈지만, 아내 생전에 같이 사용했던 냄비를 통해 기억을 반추하면서 비로소 괜찮지 않음을 자각하게 된다. 잠결에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그의 일상이 완전히 바뀐다. 연애도 하고 글도 쓰고 애나의 책도 출판하면서 예전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는 애나와의 첫 만남부터 본인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인생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죽음과 상실, 사실이 아닌 진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러다 애나의 작품으로 논문을 쓰겠다는 어린 학생 코언과의 연락이 시작되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애나의 사망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는 코언에게도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하고자 운전 대신 기차를 타라고 거듭 말하지만, 그녀도 아내처럼 설득되지 않는다. 그녀가 도착하기 하루 전, 그는 몹쓸 불안감에 집을 나서서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한다.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이다. 이 책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제목이었다. 의미를 모르는 영어단어라서, 읽기 전에는 어떤 내용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사전을 찾는 대신 책을 먼저 펼쳤다. ‘바움가트너’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70대 교수이자 작가인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품고 산다. 초반부에 감정 없이 일과를 보내는 모습에서 망실의 아픔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특히 지인의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된 사고를 전하면서 그 또한 아내의 부재로 인해 환지통을 앓고 있음을 암시했다. 냄비에 데고 계단에서 굴러 넘어지는 통증을 앓았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대화를 나누면 기분 좋아지는 UPS 직원을 만나기 위해 읽지도 않는 책을 주문하는 등 애통에 잠식된 채 살지만은 않았다. 아내의 전화를 기점으로 주디스라는 여성과 오랜만에 진정한 연애도 했다. 그의 조급한 마음과 그녀의 이전 결혼사로 인해 해피엔딩까지는 못 이뤘지만, 그가 새롭게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가족의 사멸을 겪고 나면 바움가트너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처럼 생활하나, 내면은 그렇지 않다. 정말 아픈 슬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때처럼 등교하거나 출근한다. 다만 별것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사람을 피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억지로 사람들을 만나고 연애도 한다. 그러면서도 바움가트너처럼 나이에 쫓기고, 결국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기조가 저변에 깔리면서 모든 일에 죽음을 앞에 두고 사고하게 된다. 꼭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누구든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아내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도 작고를 조망한다. 그럼에도 코언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그는 생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한다. 소설에서는 아내가 죽었지만, 현실에서는 작가가 폐암 투병 중 집필한 글이어서 작가인 남편이 먼저 떠날 확률이 높았다. 홀로 남겨질 아내에게도 코언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미리 언질을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소설은 바움가트너의 교통사고를 통해 끝을 맺는다. 처음에는 끝부분이 이해되지 않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소설이 미궁 속으로 빠진 것 같아, 인터넷을 검색하니 ‘열린 결말’이라고 했다. 그전까지 독자의 공감을 싣고 달리던 자동차에서, 갑자기 사슴이 나오고 피를 흘리면서도 운전대를 잡는 묘사에 갸우뚱했다. 죽은 아내가 전화했을 때보다 몰입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작가가 일관되게 말하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죽음은 지나가지만 잊히지 않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몸의 일부가 절단된 것 같은 고통이 수반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생도 있고 이 또한 잘 살아가야 한다. 병들어 눕기 전에 종명하는 삶은 축복이라 여긴다. 자신이 사유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데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도 유작으로 이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이변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보다는 하루를 잘 영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옆에 없지만, 계속 함께 하는 존재는 아내이자 죽음 그 자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