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한 강릉

괴발자 모드 속 마흔다섯 번째 이야기, 강릉 2부

by 돌뭉치

여행하면서 매일 글쓰기는 어렵다. 졸음이 몰려오는데, 어제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되살리기 어려워 무작정 노트북을 켰다. 20대부터 숱하게 여행을 다니면서 배운 바는 당시에 기록하지 않은 느낌은 오롯이 재현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상하게 써서 다음날 퇴고할지언정 일단 써야 한다. 오늘의 일정은 단순했다. 점심 나가서 먹기. 외식의 이유도 간단했다. 청소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방을 비워줘야 했다. 주변에 음식점을 가려면 단 5분이라도 걸어야 한다. 불볕더위에 1분도 햇볕에 노출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에어컨 빵빵 트는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적당히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세인트존스 호텔 근처에는 초당 마을이 있다. 초당 순두부로 유명한 곳이다. 대략적인 목적지를 물색하고 낮잠을 청했다. 이른 조식을 먹은 덕에 점심시간까지 넉넉했다. 휴가의 보배는 낮잠이라면서 10시에 침대로 도로 들어갔다. 엄마의 부스럭거림에 눈을 뜨니 12시가 넘어있었다. 냉장고에 보관된 단팥빵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잠결에 엄마를 말렸다.

“점심 먹으러 나갈 거니까 드시지 마세요.”

엄마가 배고픈 신호를 보냈다. 빨리 나가야 한다. 아직도 나는 포만하다. 아침 먹고 나서 십여 분 정도 해변을 걷다 바로 잤으니 배 꺼질 틈이 없었다. 가이드의 본분을 다하려면 일어나야 했다. 머리맡에 있는 휴대전화로 초당 마음을 다시 검색했다. 최종 식점과 그곳이 문을 닫았을 경우를 대비한 주변 탐색까지, 후식도 고려한 동선을 짰다. 재작년 엄마와 다녀온 프랑스 이후로 줄곧 가이드를 맡고 있는데, 길잡이도 계속하면 발전한다.


1시를 앞두고 호텔을 나섰다. 카카오T로 호출하자 금방 택시가 잡혔다. 찬 기운이 가득 찬 택시에 오르기 전까지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으니 온도 조절은 만족스럽다. 기본요금으로 초당 마을에 도착했다. 오늘의 메뉴는 솥밥이다. 재작년 엄마와 이모, 동생 부부와 고성으로 휴가 갔을 때 엄마가 제일 맛있게 먹은 요리다. 본인이 안 만든 음식은 다 맛있다고 극찬하는 엄마지만, 진짜 맘에 드는 찬을 대할 때는 동공이 커진다. 고성과 강릉,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같은 바닷가면서 현지에서 해산물 공수가 가능한 이점을 살려 평균 이상의 맛을 보장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깔끔하고 시원한 내부가 마음에 들었다. 점심시간인데도 손님 한 명도 없는 홀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작열하는 태양을 위에 두고 밖으로 나갈 엄두가 안 났다. 맛이 없어도 더위만 피할 수 있으면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메뉴판 첫 장에는 스키야키, 페이지를 넘기자 전복 솥밥이 있었다. 엄마에게 솥밥을 추천했다. 엄마는 채식파다. 기운이 달리지 않는 한 고기를 먹는 법이 없다. 엄마는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대표 메뉴를 먹는 게 어떠냐며 스키야키를 골랐다. 나도 먹어본 적 없는 일본식 샤부샤부다. 이번 여행의 주인공이 택했으니 그대로 주문했다. 육식파인 내게는 최고의 선택이다. 매일 기후 위기를 염려하면서도 간헐적 육식을 끊지 못하고 있어서 큰일이다. 그래도 휴가 때는 봐준다.


“사장님, 카스 한 병만 주세요.”

낮잠과 음식, 휴가의 마지막 퍼즐은 낮술로서 맞춰진다. 다른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을 금요일 오후, 혼자만 누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다. 잠 깬 지 얼마 안 되어 알코올이 당기지 않았지만,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일단 시켰다. 한 모금 먹고 나서 곧 깨달았다.

‘잘했다!’

찬합에 든 채소와 얇게 잘린 고기, 오징어젓갈, 양파 조림, 깍두기, 백김치, 오이소박이, 냉국, 날달걀이 풀린 소스가 상에 올랐다. 사장님은 중앙에 놓인 냄비에 채소와 고기를 차곡차곡 쌓은 다음 간장 소스와 채수를 따라 넣었다. 간장이 들어가자, 생고기는 불고기전골의 형태를 띠었다. 불고기를 좋아하는 나 때문에 종종 집에서 만들면서도 엄마는 절대 먹지 않는다. 그런데 방금 주문한 메뉴가 불고기를 형상하고 있다니, 망했다! 여행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음식이다. 어제 대성한 옹심이의 1승을 끝으로 실패라고 생각했다. 냄비가 끓자 고기 한 점을 먹었다. 분명 물에 빠진 불고기 같은데 짜지 않고 맛깔났다. 엄마가 개안한 모습도 포착했다. 걱정이 누그러들었다. 함께 나온 밑반찬도 슴슴이 맛이 좋다. 이연패를 달성했다. 이제는 맘 편히 시식만 남았는데, 앞서 마신 맥주 때문에 배가 금세 찼다. 두 젓가락질에 한 번씩 젓가락을 놓고 먼 산을 응시하니 엄마는 왜 이렇게 못 먹냐며 우려했다. 어제부터 쉼 없이 배부르다. 배고픔을 느끼고 싶다. 후식은 뭘 먹지. 본 여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가이드는 다음 행선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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