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국민성

괴발자 모드 속 예순아홉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21분 남았다. 이제는 한 해가 지나도 나이를 안 먹으니 별반 다를 게 없는 날인데, 엄마는 종 치는 걸 보고 잔다고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들어와서도 한기가 가시지 않아 씻지 않고 한 시간 넘게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었다. 11시를 넘겨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서류상 나이는 변함없더라도 신체 나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피부를 지켜야 했다. 세수하고 나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새해도 기다릴 겸 하루를 되짚어봤다.


없는 시간을 쪼개 미술관도 다녀오고 외식도 했다. 마지막 날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강행군했다. 지난주 평일에 다녀온 미술관이 한적해서 오늘도 그럴 줄 알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미술관으로 향했다. 가면서도 확신이 없어 표는 미리 사두지 않았다가, 도착해서 입구 앞에 선 인원이 몇 안 된 걸 보고서야 구매했다. 막상 전시장에 입장하자 사람이 미어터졌다. 전시장 할인 쿠폰도 오늘로써 끝난다는 걸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게 틀림없었다. 고상한 하루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었던 내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다. 관람객이 얼마나 많았으면 평일인데도 주말에만 하는 강연형 도슨트가 진행되었다. 사람도 많고 시끄럽고 심지어 옆에서 속삭이듯 대화하는 관람객 무리와 동선이 겹치면서 도저히 그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작품 감상은 입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거다. 전하지도 못한 말을 혼자 곱씹었다.


분노에 차서 남은 작품을 훑다시피 하다 약속 시간에 쫓겨 출구로 나왔다. 지난주처럼 실내가 더울까 봐 패딩도 전시장 밖에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입장했는데, 높은 인구밀도에도 불구하고 홀은 서늘했다. 난방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날씨가 그만큼 추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춥고 졸렸다. 무리하게 일정을 잡다 보니 몸에서 고장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춥고 배고프고 하품이 났다. 양심상 소녀와 비교하기는 그런데, 동화에서는 죄다 소녀와 공주만 주인공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동화를 안 읽어서 내 무지의 발로일 수도 있다. 잘못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타종을 기다리는 엄마에게는 31일이 별거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해놓고선, 실상은 내가 가장 2025년도를 아쉬워하는 행보를 보였다. 마치 옛 연인에게 품은 미련처럼 그런 한 해가 가고 있다.


해가 떴다. 어제와 같은 해가 떴다. 연도가 바뀌었고 회사 휴가와 포인트가 채워졌다. 분명 어제까지는 정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뭔가 리셋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해야 하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해 첫날 뉴스에서도 한 해를 조망하는 다양한 주제를 보도했다. 으뜸은 정치 경제 분야다. 정치 세션에서는 대통령 당선 이후 처음 치르는 6.3 지방 선거를 강조했고 경제 세션에서는 불확실성이 높아진 국내외 경제를 예측했다. 그중에서도 매년 변하지 않는 공통 주제가 있다. 우리나라가 항상 ‘위기‘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과거 국제 원조를 받았을 때도 그랬고 지난해 수출액이 7천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세계 수출 순위 6위를 달성했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안도하자는 게 아니라, 이 정도면 잘했다고 칭찬해도 되지 않을까.


계층, 세대 간 벽이 높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경쟁 위주의 세태가 이를 조장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여유를 가져도 된다. 새해 다음날 휴가임에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원래는 휴가 날 집안에만 있으면 억울해서 어디라도 나갔는데, 오늘만은 이렇게 추운 날 온전히 실내에만 머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연말 한파의 경험은 확실히 각인되었다. 특별히 한 일없이 온종일 책만 봤다. 밤이 되니까 아무것도 안 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밀린 글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아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마셨다. 평소 카페인에 취약한 나도 이렇게 할 일이 있을 때는 졸음에 대한 항체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뿌예지고 위기감만 남았다. 결국 나도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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