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부터의 구원

괴발자 모드 속 예순여덟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그가 그녀를 죽였다.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을 자신의 기억 속 모습으로 되살리고자 부단히 노력하다 죽이고야 만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아듀》다.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에서 퇴각하면서 치렀던 베레지나 도하 전투에서 헤어졌다가 전쟁이 끝나고 필리프 드 쉬시랑 대령과 스테파니 드 방디에르 백작 부인은 재회했다. 그러나 그녀는 실성해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여성성’을 지녔던 그녀로 되돌리기 위해 도하 전투 장면을 재현하지만, 그 기억을 찾은 순간 스테파니는 죽었다.


초반부터 가파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은 구석이 몇 있었다. 가장 큰 부분은 소설을 관통하는 필리프에 대한 분노다. 그는 변화된 연인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고 중반을 넘어서는 그녀를 죽이려고 권총까지 장전했다. 다행히 숙부의 거짓말로 그녀는 살았지만, 그럼에도 필리프가 스테파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자신이 괴롭다는 이유로 애인을 살해하려는 폭력성에 치가 떨렸다. 그녀를 보살피는 숙부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조금 전 생사를 넘나든 그녀에게 행복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용서하자고 했다. 부모였다면 자기 딸에 총구를 겨누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를 향한 불신은 조카딸에게 아편을 먹이면서까지 필리프에게 협조하는 행태를 보며 확실해졌다. 그녀의 상처에는 관심 없이 예전에 보기 좋았던 시절로 돌려놓기 위해서만 고군분투했다. 진정으로 그녀를 위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데 마음이 아팠다.


그 사람 다음으로 불편했던 요소는 그녀, 스테파니다.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의지해 수레로 운반되었다. 전투 장면 처음부터 이런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이미지는 썩 좋지 않았다. 능동적인 여성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전쟁 중에는 두 발로 걸어야 하지 않았을까. 계속된 전쟁의 공포에 의지력을 상실했을 수도 있고 작가가 의도대로 만들어낸 캐릭터일 수 있다. 그럼에도 전투 장면을 보고 있자면, 역사를 토대로 1830년대 실제 있을법한 인물을 그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기억은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왜곡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억을 잃기로 했다. 그녀의 결정에 동조하면서도 자국의 잔다르크 같은 면모는 지닐 수 없었는지 안타까웠다. 그랬다면 못난 필리프 같은 남자는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백작 부인에 필리프의 정부까지, 두 남자를 옆에 두고 본인의 안위를 챙기려고 한 스테파니의 소극적인 태도가 답답했다.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와 그녀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반부에 자기 고통을 꺼내지 않으려는 필리프를 보면서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과묵한 신사라고 생각했다. 책을 덮었을 때, 그저 편한 기억만 말하고 싶어 하는 비겁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끝내 자살로서 그 불편한 심정을 독자에게 전가하기까지 한다. 소설 전체에 등장하는 인물은 필리프가 유일하므로 삼자의 시선으로 쓰였음에도 상당히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짐승처럼 행동하는 스테파니를 두고도 영롱한 아름다움을 말했고 그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싱그러움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젊은 여자의 광채를 되찾았다’고 표현했다. 스테파니 입장에서는 많은 장면이 오해로 점철될 수 있다. 그의 기억이 매개인 소설에서 그녀는 그의 이름과 사랑, ‘아듀’를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것이 작별 인사일지, 애인에게 표하는 아쉬움일지 모호하지만, 내가 내린 정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과의 단절이다. 스테파니로부터 필리프를 완전히 끊어냄으로써 그녀를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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