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발자 모드 속 예순일곱 번째 이야기
대하를 먹었다. 새우 킬러인 나는 새우가 들어있는 모든 음식에 주저함이 없다. 알레르기가 있는 예전 남자 친구 앞에서도 배부르게 새우를 먹었다. 앞에서 까주는 새우를 냠냠 받아먹는 행복함이란, 가을에 새우는 진리다. 몇 년 전 새우의 조상이 바퀴벌레라는 사실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회식 자리 상사로부터 새우껍질을 까고 있는 와중에 들었기 때문이라 시식을 멈출 수도 없었다. 새우에 대한 감회를 적으려고 새우의 조상을 찾으면서 이번에 알았다. 새우와 바퀴벌레의 공통점은 많지만, 진화적 거리는 아주 멀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실을 외면하며 한 십 년이 흘렀다. 무서워서 사실을 파헤쳐 보려 하지 않았다. 새우 먹을 때마다 바퀴벌레가 생각났으나, 눈을 감았다. 새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해소되었다. 이제 다시 새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하다.
오랜만에 유퀴즈를 봤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작년에 무동력 요트 세계 일주를 한 이나경 님이 출현했다. 잠깐 시간 때울 요량으로 딴짓하면서 보았기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러다 명대사를 만났다. 조타가 힘들 정도의 파도가 치면 잠깐 방향키에서 손 떼고 배가 알아서 나아가도록 둬도 된단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방향을 바꿔도 늦지 않다고. 당시 조타수이던 그녀에게 선장이 해준 말이라고 했다. 뜻대로 일이 안 풀릴 때는 흘러가는 대로 둬보자. 새우도 참고 계속 먹으니 저절로 마음의 짐을 덜지 않았는가. 그때 포기했다면 십 년 동안 못 먹은 새우가 아까워서 억울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더한 일도 많다. 우리 집주인은 몇천만 원 집세는 올리면서 오천 원이 아까워서 빨래 봉 교체를 안 해줬다. 내 앞에서는 대인배처럼 굴면서 뒤로 공인중개사를 조정하다 나한테 들켰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나쁜 사람들을 다 만나고 오겠네.” 가만둬도 그는 곧 본인보다 더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날씨를 보려고 틀어놓은 9시 스포츠 뉴스에서 그를 처음 봤다. 해맑게 웃으면서 계속 뛰는 낭만 러너 심진석. 다소 오글거리는 수식어 때문에 시선을 돌리려다 표정이 맑아서 화면에 고정되었다. 성인이 어쩜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지. 본업은 비계공이고 취미로 마라톤을 한다고 했다. 처음 듣는 직업이라 찾아봤다. 건설 노동자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막노동 같았다. 직업적 편견은 없다. 그저 평일에 고된 육체노동을 하고도 달리기까지 병행하는 그의 체력에 놀랐을 뿐이다. 그는 아마추어 마라토너라고 하기에는 실력이 어마어마했다. 인터넷에서는 그의 이름을 단 다수 영상이 검색되었다. 유퀴즈 출연을 비롯해 이미 유명세를 치른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안전화를 신고 뛰고 GPS 시계도 없다는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어차피 마라톤 경기에서는 1킬로미터마다 시계가 있어 본인이 찰 필요가 없단다. 이 말하는 도중에도 미소 짓는 심진석 님과 백만 원의 상금이 절실하다며 웃어내는 이나경 님을 떠올리며 내 표정은 왜 경직되어 있는지 생각이 멈췄다.
물적, 인적 자원 모두 풍부하게 지원받고 있음에도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 기분 전환하고 싶어서 그의 기사를 다시 찾아봤다. 아무래도 심진석 님 사진을 출력해서 벽보처럼 붙여놔야겠다. 심진석 님과 이나경 님, 새우 중에 나를 더 미소 짓게 만드는 대상은 무엇일까. 그래도 이왕이면 이상형을 보는 게 낫지 않나. 심진석 님은 내 스타일이 아니고 이나경 님은 여자다. 새우는 보는 것 말고 먹는 게 더 낫다. 세 피사체 모두 포스터에 붙여놓을 만한 정도의 애정은 아닌 것 같아 아직도 책상에는 붙어있는 게 없다. 대신 이것만은 확실하다. 원래 ‘마라톤’하면 1순위로 떠오르는 이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였는데, 이제 바뀌었다. 뛰고 있을 때만큼은 낭만 러너의 표정이 더 행복해 보인다. 최소한 내가 본 사진에서는 심진석 님이 더 활짝 웃는다. 그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맑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