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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나이테

괴발자 모드 속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글의 힘은 대단하다. 꼭 옆에 있지 않고 직접 말 안 해도 위로가 되는 글이 있다. 오늘 동생이 보낸 메일이 그랬다. 퇴근길에 메일함을 열어봤다. 며칠 전 제목은 먼저 봤다. 시간 날 때 여유 있게 읽으려고 묵혀놨다가 퇴근길에 열어봤다. 평소에는 내가 글쓰기 시작하면서 참고할 만한 좋은 글들을 모아서 보내줬는데, 오늘은 짤막하게 편지도 적어줬다. 내 글이 좋다고, 내가 점점 멋있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찡했다. 요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다.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배우고 싶은 게 많아 욕심을 좀 부렸다. 3개월을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았다. 동생은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보통 때 하지 않는 칭찬도 했다. 자주 있지 많은 말이라 더 위안이 된다. 동생은 믿어도 된다며 한 번 더 당부했다. 역시 나를 잘 아는 동생이다.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그 말이 그렇게 위안이 된다. 동생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치 옆에 있는 듯 나를 다독인다.


나이에 민감해진 요즘, 존 릴런드 작가의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을 읽었다. 책 자체는 큰 재미가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번역서는 흥미를 끌기 힘들다. 원문이 주는 글맛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를 못해서 원문을 읽을 수 없는 나를 탓해야 함이다. 이 책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노인 여섯 명의 생각이다. 여든 살이나 아흔 살의 사람에게 여생은 죽음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삶이라고 여겼지만, 당사자에게는 여전히 사랑하고 즐기고 싶은 인생의 기간이었다. 그들도 젊은이처럼 자아가 있고 행동하기를 원했다. 다만, 사회가 너무 빨리 변화면서 그 속도를 내기 힘들어할 뿐이었다. 기성세대, 태극기 부대 등 어르신들을 가리키는 단어는 많다. 사고의 울타리 안에서 갇혀서, 내가 그들을 잘못 정의한 것 같아 반성한다. 우리 아빠도 생전에 태극기 부대 소속이셨다. 단지 의견을 내고 싶었을 뿐인데, 귀를 막고 반응하지 않는 딸이 답답해서 광화문으로 나선 게 아닐까. 광화문에 가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힘껏 외칠 수 있다.


오늘 집을 나서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바닥에 수박 한 덩어리를 내동댕이 치고 물으셨다.

“아가씨, 잠깐 시간 있어?”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혀서, 키패드 입력 후 다시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이것 좀 읽어봐 줘.”

건강검진 결과서였다. 쓰인 문구 그대로 읽어 내려가자 2차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정상이라는 거야?”

검사 결과는 정상이나, 평소에 이상 징후가 있으면 가정의학과에 방문하라는 안내 문구가 덧붙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문의해 보시라고 했다.

“가정의학과가 어디 있지? 내일 가면 되나?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안 하나?”

예약하고 방문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니, 어떻게 하냐고 물으셨다. 일단 전화부터 하라고 하자,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하셨다. 결과서 봉투 앞에 검진센터 번호가 적혀있어 그 숫자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대신 전화해 달라고 하셨다. 나는 보호자가 아니래서 예약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자, 본인 휴대전화로 걸면 된다면서 재차 부탁하셨다. 더 이상의 친절은 무리였다. 죄송하다고 허리 숙여 인사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걸어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노화는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큰 벌이 아닐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고,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막상 죽을 때가 되면 바삐 움직인다. 이승에 더 머물기 위해, 혹은 아픔의 고통이 두려워서 미리 대비하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언젠가 나도 그렇겠지. 노쇠는 사고도 변화시키니까 말이다. 죽을 날짜를 정해서 그날까지만 살다가 깔끔하게 사라지고 싶지만, 현대의 제도권에서는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은 어렵다. 20대와 30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40대가 되자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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