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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의 양이 되어

괴발자 모드 속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주말 아침,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시루 생각이 난다. 작년 처음 만났을 때는 보자마자 엄청 짖었다. 나는 개를 겁낸다. 어렸을 때 강아지도 키웠는데, 어떤 계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개가 무서워졌다. 그런 내가 2주간 시루와 동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호주에 사는 동생에게 왔기 때문이다. 출발 전부터 견 서적을 다독했다. 개의 심리를 알고 접근하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다. 그런데 막상 닥치니 이론은 전혀 필요 없었다. 책에서는 분명 처음 만난 개에게 시선과 관심을 주지 않으면 짖던 개도 멈춘다고 했다. 하지만 시루는 그러지 않았다. 조그마한 덩치에서 공룡 같은 울림으로 나를 향해 외쳤다. “나가! 내 집에서.” 문제는 갈 데가 없었다. 한국이면 우리 집으로 돌아갈 텐데,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한동안은 같이 살아야 했다. 시루가 짖을 때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저렇게 짖다가 나한테 달려들면 어쩌지,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열 시간의 비행기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또 다른 극한 공포가 나를 덮쳤다.


시루는 우리 집 첫 손녀이자 조카다. 석 달 뒤면 첫돌이다. 개는 사람보다 7년씩 빠르게 나이 든다고 하니, 언제 이렇게 컸는지 감개무량하다. 당시의 기억을 소환하면, 우리를 번갈아 보며 짖던 녀석도 간식을 주자 먹기 시작했다. 물론, 다 먹고 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이방인들에게 소리쳤다. “내 구역에서 나가.” 동생과 제부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녀석을 달랬다. 아주 가끔 그들의 품에서 빠져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우리 주위를 빙빙 돌기도 했다. 투리드 루가스 작가의 《카밍 시그널》에서는 개가 짖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란다. 통상적으로 대형견은 잘 짖지 않는다.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의미다. 반면 소형견은 큰 개가 지나갈 때마다 필사적으로 큰 소리를 내며 방방 뛴다. 시루도 내가 무서워서 저러는 걸까. 잡생각을 하며 두 시간 넘게 녀석을 주시하다 보니, 녀석이 가만있으면 나도 덩달아 긴장이 풀렸다. 녀석은 소파 위에서, 나는 거실 땅바닥에서 서로를 감시했다.


시루의 얼굴은 보더콜리를, 몸은 웰시코기를 닮았다. 귀가 크고 다리가 짧다. 특징적인 외형은 눈과 색이다. 눈이 정말 크고 똘망똘망하다. 이보다 더 맑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눈빛이 또렷하다. 외모 평가에서 사람은 보통 눈이 크면 유리한 점수를 받는다. 비슷한 잣대를 강아지에도 적용해도 될 것 같다. 그래서 시루도 잘 생겼다. 피부를 덮은 색도 다섯 가지나 된다. 귀와 눈, 코 등은 꺼멓고, 뒤통수와 배, 다리는 하얗다. 검정과 흰색이 교차하는 부분에는 갈색으로 음영을 주어 자연스러운 전환을 추구한다. 눈썹은 드문드문 흑색을 띤다. 콧잔등과 발바닥은 분홍빛이다. 성격은 양몰이를 했던 보더콜리의 기질을 받아서 용맹하다. 도그파크에서 본인보다 몸짓 큰 개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개구쟁이면서, 동시에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아이들과 개한테는 사정없이 짖는 깡패다. 원을 그리면서 우리 주위를 움직이는 이유도 자기 목장에 새로운 양이 들어왔으니 신입 훈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동생이 말했다. 반나절을 그렇게 으르렁대기를 반복하니 지친 듯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아니면, 신입 양에게 이만한 군기면 충분했다고 생각했을까.


동생 집에 온 지 고작 세 시간 지났다. 녀석은 잠잠한 것 같다가도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만 서면 짖기 시작했다. 귀도 아프고 몸에 계속 힘을 주고 있다 보니 어깨도 결렸다.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도저히 일어날 엄두가 안 났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어떻게 보내지, 한국이 그리웠다. 피곤해서 눕고 싶은데 거실에서 안방 침대까지 열 걸음 뗄 엄두가 안 났다. 녀석도 하도 짖어 목이 마른 지 테라스 옆 대접에서 물을 헐레벌떡 마셨다. 그 틈을 타 얼른 일어섰으나, 금세 알아채고 커다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모는 너를 헤치지 않아. 그리고 한국에서 껌과 간식, 카펫까지 다 챙겨 왔는데 정말 이럴 거니.’ 시루와 말이 통하면 참 좋을 텐데 내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 유일하게 눈초리를 거두는 순간이 가장 좋아하는 돼지귀 간식을 먹을 때다. 엄마·아빠도 못 뺏어 먹게 한참 멀리 떨어진 채 혼자 구석에 가서 숨어 먹는다. 조카선물은 돼지 귀였어야 했다. 때로는 책이 아니라 직접 물어서 해결해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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