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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괴발자 모드 속 서른두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고 혼자 중얼거린다. 옆에 앉은 이와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 홀로 말한다.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전화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2016년 겨울,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이 처음 출시된 이후 햇수로 8년이 지났다. 귀에 박혀있는 이어폰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신기한데, 귓구멍 형태가 개인마다 다른 데도 기성품이 들어맞는 것은 더 신기하다. 나도 이어폰을 장착한 채 맞은편 중얼대는 이들의 입모양을 지켜본다.


회사는 협업을 강조해서 매년 소통을 외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많이 말한다. 회의에 가면 서로 자기 말을 전하려고 목청을 높인다. 소통의 평가 지수가 발화자의 목소리 크기와 속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함이 분명하다. 웅변하는 사람 주위로 귀는 열고 눈은 각자의 휴대전화를 주시하는 대중이 있다. 이어폰이 꽂혀 있지는 않지만, 과연 잘 듣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다수의 대인관계 심리학 책에서 대화에서 중요 요소가 경청임을 이야기하나, 우리는 항상 까먹고 먼저 말한다. "그게 아니야, 내가 생각할 때는" 이러면서 또 말한다. 성격 급한 나도 말 자르기를 잘한다. 침묵의 힘을 책에서 깨닫지만, 책을 덮자마자 우리는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말한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명상과 템플스테이가 주기적으로 유행한다. 스스로 할 수 없으니, 나를 그 공간에 가두는 방법으로 말이다.


다시 지하철이다. 여전히 눈과 귀는 휴대폰과 이어폰으로 연결되어 있다. 옆 사람과 대화하는 이는 없어도 허공에 대고 말하는 이는 칸마다 분명히 있다. 이어서 통화를 자제하라는 기관사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그래도 통화는 끊기지 않는다. 그들의 귀는 이미 이어폰에 점령당해서 방송을 들을 수 없다. 오감각을 담당하는 신체 부위 중, 시각과 청각은 강점당했다. 하지만 속절없이 우리의 감각을 내줄 수는 없다. 그리하여 초능력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사람의 직감은 신기하다. 귀신같이 볼 때가 있다. 평소에 나는 눈이 나빠서 안경을 껴야 주변인이 잘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윤곽만 어슴푸레 확인해서 모르는 이한테 인사하거나 아는 이를 지나치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 몸에 부착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껴서, 목걸이, 팔찌, 심지어 안경까지도 잘 못 쓴다. 어쩔 수 없이 버릇없는 인간이 한번 되었다가 기회를 봐서 변명한다. 진짜 안 보여서 그렇다고, 죄송하다고.


보지 말아야 할 사람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회사에서 유독 잘 그런다. 안 보고 싶어도 일터에서는 피할 도리가 없다. 어제도 그랬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다가 우울한 월요일은 피자지 하면서 줄을 섰는데, 전면에 낯익은 뒤태가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말이 안 되잖아. 이렇게 붐비는데 마주칠 수가 있겠어. 생각에 집중할수록 맞다는 확신이 밀려왔다. 일단 나를 숨겨야 했다. 다행히도 그와 나 사이에는 방패 같은 다른 이가 껴있었다. 앞사람은 나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었다. 그 뒤에 숨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휴대전화를 봤다.


피자는 오픈 주방에서 바로 조리하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다. 심지어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피자 공수를 들키지 않을지 애가 탄다. 직선이던 대기 라인은 쟁반이 놓인 테이블에서 코너 형태로 꺾인다. 위험한 구간이다. 기역 자 모양이 되면 내 정체가 탄로 날 수 있다. 최대한 앞쪽으로 바짝 붙어서 가지런한 대형을 이탈한다. 코너 이후에는 다시 직진이다. 그전까지 전방을 바라보던 몸이 일렬횡대로 늘어선다. 이제부터는 앞사람에 의지하기도 힘들다. 얼굴을 사선으로 돌려서 먼 산을 바라본다. 피자에 가까워질 때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자튀김 많이 주세요." 맞구나! 나는 초능력자가 확실하다. 안 보여도 본 것처럼 알 수 있다. 시각을 구했으니, 다음번은 청각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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