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발자 모드 속 스물네 번째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보려고 상영 중인 극장을 찾았다. 전국에 딱 한 곳 있었다. 예매 일주일 전인데도 꽤 많은 자리가 차 있었다. 한 석 남은 뒷자리를 예매하고, 그렇게 오늘 광화문에 나왔다. 꽤 오랜만에 찾는 광화문은 탄핵 반대 시위의 여파로 아직도 도로가 빼곡했다. 차가 아니라 회색 플라스틱 의자로 메꿔진 길가에는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인파로 빼곡했다. 시청역에서부터 극장까지 10여 분이 넘는 긴 거리에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버스들이 차 벽을 이루며 봄날의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 길을 걸으면서 눈에 띈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노점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당연히 난전이 있는 법, 상인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한 개 2,000원 두 개 3,000원이라고 적힌 널빤지를 세워두었다. 본인의 신념을 지지하러 온 이곳에서도 상행위가 이뤄지는 모습이 우스웠다. 채사장 작가의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무한 편에서 ‘신념’은 생각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뜻하지만,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임의성, 제한성, 맹목성을 띤다고 설명한다. 내가 주목한 특성은 맹목성으로서, 자신이 가진 신념의 기원이 타인의 이익이 개입한 결과라는 의미다. 과연 저 거리 행인들은 누구의 이득을 위해 대신 희생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분명한 사실은 국기 가게 사장님은 수익을 챙겼다.
다음은 국기다. 왜 하필 성조기일까. 한국 시각으로 4월 25일 새벽 한국과 미국의 관세 협상에 대한 2+2 통상 협의가 이뤄졌다. 덜 주려는 측과 더 내놓으라는 측의 치열한 머리싸움이 전개되는 와중에, 그들이 왜 성조기를 흔드는지 궁금했다. 과거에는 우방이었더라도, 현재 경제적인 논리 앞에서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미국이 폭탄 수준의 국가별 상호 관세를 통해 전 세계를 적으로 만들면서 EU와 중국은 협력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특히, EU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변덕으로 인해 지정학적 동맹 관계까지 흔들리면서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줄이고 중국과 경제를 포함한 다각도의 전략적 협조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러한 지구촌 상황을 옆에 두고도 광화문에서는 여전히 성조기가 펄럭인다. 저 국기는 누구의 신념을 위한 것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경제 송형석 기자가 쓴 칼럼 〈위기의 베트남〉을 읽었다. 2023년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격상되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은 전폭적으로 베트남의 초대형 성장을 지원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46%에 달하는 초고율 상호 관세 부과를 예고했다. 베트남 경제는 초비상사태가 되었고 그 틈을 중국이 기민하게 파고들고 있다. 그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미국의 관세 압박에 공동으로 대응하자고 베트남을 압박했다. 베트남은 두 강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현지 공장이 있는 한국도 앞으로의 베트남 행보가 중요하다.
광화문에 나부끼는 성조기가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친다.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나라는 강대국뿐이다. 베트남이나 우리나라는 자력으로 할 수 있게 없다. 이 칼럼이 유독 두드러진 이유는 조형근 작가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를 읽었기 때문이다. 조 작가는 1900년대 세계열강의 땅따먹기 게임에 휘말린 약소국 사람들의 고통과 번뇌를 풀어주었는데 그때의 이야기가 현재와 묘하게 닮아있다. 한 세기를 기점으로 전쟁의 대상이 영토에서 무역으로만 바뀌었다. 강대국의 횡포에 힘없는 국가는 당하고 국민은 시름한다. 작가가 단 부제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여전히 통용되는 것이다. 미국의 들쑥날쑥 관세 정책에 나의 호주머니 물가는 요동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