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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결은 이롭다

괴발자 모드 속 스물세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이틀 연속 비가 오니 우울감이 밀려온다. 어제는 장대비에 소방관들이 맘 놓고 쉴 수 있다며 좋아했는데, 비가 계속되니 마냥 기쁘지는 않다. 이 기분을 멈추고자 울결 할 때 좋은 점을 억지로 끄집어낸다.


쓰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 행복할 때는 시선이 밖에 있었는데, 우울해지면 그 눈길이 내면으로 향한다. 괴롭고 답답하고 근심이 쌓인다. 슬픔이나 그리움과는 결이 다르다. 이때 글을 쓰면 명작이 나온다. 판단은 상당히 자기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두 달 넘게 글을 지으며 터득한 바는 솔직하게 썼을 때 글맛이 제일 좋다는 것이다. 기자 지망생이었던 동생도 자체 검열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삶에 희열이 느껴질 때는 내 인생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듯 잘 보이려고 글에 꾸밈이 많아진다. 생에 활기가 없어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쓴다. 《견딜겁니다》의 진서연 작가도 똑같이 말했다. 행복할 때는 글이 안 써진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적기 시작했다.


입맛이 없다.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다. 맛이 없다는 게 이런 거란걸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알았다. 정말 우울할 때는 미각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음식을 먹어보고 맛이 느껴지면 아직은 살만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울증에 빠져든 거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의욕까지 하나도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병원을 찾는 이가 있다면 손뼉 쳐줘야 한다. 의지는 있으니까. 나는 그렇지 못해서 자가면역 체계를 갖췄다. 전시 중 지휘관의 전술은 무척 중요하다. 의사는 전략적으로 나약한 항원을 전쟁에 내보내서 조기 승전을 달성하지만, 병법이 전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단독 출정하기 때문에 전투가 길어진다. 전란 중 부상이 만연하고 승패 역시 매일 바뀐다. 장기간 싸움에서 우울증의 정점을 찍고 조증의 감정선에 올라탔을 때 최종 승리하면서 항체라는 포상품을 거머쥔다. 감정의 그래프가 반전하는 구간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우울의 터널에 진입했다면 묵묵히 통과하기를 권한다. 공짜 다이어트도 할 수 있으니 마냥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울결의 이점 두 개까지는 잘 생각했는데, 막상 세 번째가 되니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삼'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끼워 넣었다. 대미는 남들을 신경 안 쓰게 된다는 점이다. 괜찮은 회사원, 바른 학생, 착한 딸로 살기 위해서 예쁜 말과 좋은 행동만 했다. 타인의 부탁을 거부하지 못하고 “괜찮다.”며 승낙했다. 근데 울증과 격렬한 교전 중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몸이 움직인다. 어차피 저 사람이 내 장례식 때 올 사람도 아닌데 하면서, 소중하게 챙겨야 할 사람의 청만 수락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사절한다. 우울감이 사라졌을 때 내 귀중한 지인 한 명이 말했다. 내가 아무리 심한 표현으로 거절해도 상대방이 느끼기에 과하지 않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착한 사람의 탈을 벗었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울적할 때 이로운 점을 정리하다 보니 기분이 맑아진다. 쥐어짜 낸 세 번째 미점이 그럴듯해서 더욱 흡족하다. 여전히 비가 오지만, 카페에 퍼지는 재즈 음악도 좋고 창밖에 내리는 비도 이렇게 낭만적일 수 없다. 책상 건너편에 앉아서 중국어인지 독일어인지 모르는 언어를 십분 간격으로 발설하는 그녀의 소리도 짜증이 덜어내 진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 글이 폭삭 망할 수 있는데, 퇴고할 때 이미 ‘척’이 가미되기 시작했다. 내 정서는 지복과 한층 가까워졌고, 내 글은 졸작과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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