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비한 오케스트라

괴발자 모드 속 스물두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오랜만에 오케스트라를 보았다. 원래 실내악을 좋아하는데, 주인공 미호씨를 위해 장르를 바꿨다. 곧 다가올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미호씨와 대규모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이 함께 참여하는 음악당을 찾았다. 앞에서 다섯 번째 줄에서 고개를 약간 들어 올리고 봐야 해서 목이 뻐근하다가도 절정으로 치닫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통증이 잊힌다. 온종일 글감을 찾는 나에게 코앞에서 펼쳐진 무대는 새로운 흥밋거리로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했다.


가장 큰 발견은 합주의 통솔자로 알려진 지휘자다. 오늘 내가 본 그는 땅에 발이 붙은 무용수였다. 연주 내내 신나게 몸을 흔든다. 두 발은 손 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지면과 접지한 다음 절대 떼지 않는다. 조용한 곡에서는 발레를 추듯 우아하게 좌우로 흔들리고, 경쾌한 곡에서는 앞뒤로 요동친다. 마치 팝핀을 추듯 절도가 있다. 이때 안무의 핵심은 팔이다. 지휘봉을 쥐고 있는 오른팔은 제약이 많으니, 왼팔로 휘황찬란하게 하늘을 휘젓는다. 지휘를 배울 때 팔로 허공을 가르는 법을 배우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지휘자가 화려한 춤을 추는데도 대다수의 연주자는 주악 시간 내내 그를 보지 않는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그의 몸짓은 더욱 격렬해진다. 연주자의 시선은 악곡의 시작과 끝, 딱 두 번만 그에게 향하고 나머지는 악보에 고정한다. 음악에 심취한 연주자와 율동에 도취한 지휘자는 그렇게 훌륭한 곡을 만들어낸다.


다음 레이더에 포착된 장면은 지휘자를 둘러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표정이다. 그들의 눈길을 따라가다가 자연스레 얼굴에서 멈췄다. 수십 명의 인원 중 안색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독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심취하거나 웃는 표정을 가진 단원 수가 10%도 안 되는 것 같다. 같은 회사원으로서 그들의 심정은 이해한다. 이런 종류의 실연은 연휴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대목이다. 5월 가족의 달을 맞아 긴 연휴에 식구들과 함께 공연장을 찾지만, 이들은 휴일에도 일해야 한다. 근로자의 날을 막 지난 터라 같은 노동자로서 맘이 쓰인다. 나도 일할 때 웃지 않는다. 무표정으로 일관해야 추가되는 내 일을 막을 수 있다.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훌륭히 소화한다. 그들의 주악에서도 사명감이 드러난다. 월급쟁이로서 우아한 안색 없이도 굉장한 곡을 낳는다. 나는 악곡이 마무리될 때마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가장 마법 같은 광경은 신비의 나무문이다. 해리포터나 어벤져스처럼 유명한 영화 OST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곡이 짧았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지휘자는 퇴장과 입장을 반복했다. 신통하게 그가 단상에서 내려와 문으로 돌진하면 목문이 열린다. 손잡이도 센서도 없는 문이지만 밀지 않아도 벌어진다. 보컬리스트와 솔로 테너가 퇴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분명 개폐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절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문 뒤에 숨어 자동문처럼 곡의 개막과 폐막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그가 《오페라의 유령》 같아서 궁금해졌다.


장쾌한 매듭으로 공연은 끝났다. 어렸을 때는 몰랐으나 성인이 되어 피아노를 치면서 터득한 게 있다. 연주도 일종의 육체노동이라는 점이다. 프로 연주자와 비교할 수 없는 연습량으로, 고작 한 시간 건반을 두드리지만 마치고 나면 팔이 뻐근하다. 이들은 두 시간 동안 신나게 활을 켜고 소리를 불었으니 얼마나 피곤할까. 그들의 고급스러운 노동에 경의를 표한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다 같이 퇴석할 때까지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음 커튼콜 때는 문 뒤에 숨은 유령도 잠깐 나타나 주기를 기대한다.


※ 안내: 미호씨에 대한 소개는 목차 〈뿌리를 찾아서〉에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 세상의 펄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