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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은씨의 준롱런

괴발자 모드 속 열아홉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미호씨 생일에 상은씨한테 갔다. 그녀는 고양에 살고 그는 파주에 산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자연법칙에 의해 따로 산다. 육신이 있는 그녀와 영혼만 존재하는 그의 동거는 규범상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이지도 않는 그를 붙잡고 슬퍼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연애에서는 전자가 훨씬 불리하다. 볼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는 대상을 두고 절절한 구애라니, 짝사랑이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난 아직도 상은씨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다녀오면 엄청난 슬픔이 몰려올까 봐, 아빠한테 가기를 주저한다. 지금 꽤 삶이 온화해졌는데, 다시 태풍급 강풍이 분다면 서 있기 힘들 것 같았다. 미호씨와 그녀의 동생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일정을 잡고 나를 데려갔다. 첫 번째 제안에 “엄마, 제가 그날은 안 돼요.”, 두 번째 “엄마, 저 상관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세 번째 “저는 혼자 언제든지 갈 수 있어요.” 삼고초려에도 나는 거절했지만, 날짜는 정해졌다. 그제야 정확한 이유를 그녀에게 밝혔다. 난 아직 아빠를 마주하기 힘겹다고.


상은씨 집은 해가 잘 드는 산꼭대기에 있다. 원래 12월 군사 반란 때 계약하고 허그 데이에 이사했는데, 그때는 겨울이어서 잔디 상태가 그의 머리 같았다. 칠십이 넘어서도 흰머리 하나 없이 자연 흑발을 고수한 그지만, 문제는 모발의 개수에 있었다. 사십 넘어서부터 진행된 원형 탈모는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뒷머리에 커다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아프고 나서는 요양원에서 머리를 깎아 민머리 상태였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미호씨는 아파했다. 봄날에 다시 찾는 그의 집은 잔디가 수북이 덮여있었다. 이곳이 좋긴 좋은가보다. 새파란 잔디를 보니 아빠 머리도 빼곡할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다.


미호씨는 그의 이름이 적힌 비서를 붙잡고 흐느낀다. 뒤에 있던 나와 그녀의 동생은 머쓱해진다. 나는 그녀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 채, 왜 생전에 아끼지 않았냐고 타박한다. 그래야 그녀의 울음이 멈출 것 같았다. 그녀는 참 정이 많다. T 98%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을 가졌다. 아빠 처지에 오래 살아서 뭐 하냐고, 말도 안 통하는 데 빨리 떠나는 게 낫지 않느냐며 모진 말만 토해낸다. 상은씨 앞에서는 여전히 과묵하게 입을 닫는다. 드문드문 내 꿈에 나타나는 아빠를 보면 그냥 잘 계신 것 같다.


어버이날을 앞둬서 그런지 추모 공원에는 가족 단위 성묘객이 많았다. 상은씨 집 근처에도 강아지와 함께 온 50~60대 사이 여성분이 있었는데,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아들을 보러 왔음을 알았다. 일주일마다 온다는 그녀를 두고, 나는 한편으로 안도했다. 상은씨는 노년기에 떠났지만, 그녀의 아들은 청년기를 중도 이탈했다. 이승과 저승의 삶 중 어디가 더 나은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이생에 있다 보니 젊어서는 지상에서 좀 노는 게 낫지 않느냐고 자문한다. 그런 측면에서 상은씨는 준롱런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호씨는 작년 호주에 사는 딸한테 가기 전부터 상은씨한테 보러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반년 만에 하다니, 역시 우리 부모의 참을성은 알아줘야 한다. 다녀와서는 마음이 무척 편하단다. 나는 그녀의 순정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래도 평생 절절히 애정할 사람이 있다는 게 좋다는 데는 공감한다. ‘사랑이 최고의 휴식’이라고 문보영 작가의 《준최선의 롱런》에서 읽었다. 그녀가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사모하게 내버려 둬야 하는데, 못 참고 한마디 했다. “인제 그만 아빠를 보내주세요.” 마음과 말이 따로 노는 딸내미는 혼자 있는 지금에서야 허공에 데고 외친다. 미호씨, 상은씨를 마음껏 사랑하세요.


※ 안내: 미호씨, 상은씨에 대한 소개는 목차 〈뿌리를 찾아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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