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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괴물들의 세계

괴발자 모드 속 서른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에는 세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엄마, 무기노 사오리는 아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판단하고 학교로 찾아간다.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가 뉘우치지 않자, 학교 측에 강력히 건의하며 그의 파면을 끌어낸다. 호리 선생이 바로 문제의 교사다. 그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꼈다. 심지어 사오리의 아들이 같은 반 학생을 괴롭힐 때도 화해로 풀려고 했다. 이러한 진상은 학부모와 학교에 전달되지 않는다. 사오리는 거듭 사과를 요구하고,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교장은 모든 잘못을 그에게 돌려 해임한다. 그의 제자이자 사오리 아들이 미나토이다. 모든 사태와 연루되어 있음에도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오해하고 왜곡된 진실 안에서 그는 밀실 친구 요리와 함께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미나토의 집 앞 건물의 불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화재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부모, 선생, 아이의 눈길에 따라 사건이 벌어진 경위를 재해석한다. 사오리는 화염 속 단란주점에 호리 선생이 있었다고 오해하는데, 사실 그는 여자 친구를 데리러 주변에 있었던 사실밖에 없다. 또한 죽은 고양이를 화장시키기 위해 낙엽을 태우는 요리의 행동을 통해, 해당 건물에 불을 지른 주범이 요리로 드러났다. 가정폭력을 당한 그는 아빠가 거기 있을 거로 생각해서 그랬다고 했다. 아이의 팔에 난 화상 자국이 쓰라리다. 이야기가 끝날 것 같으면 다시 시작되는 전개 방법으로 인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까지 자리를 지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달리 말하면 결말이 확실하지 않다. 완결되지 않은 채 마무리되기 때문에 보는 이마다 다르게 해설한다. 감독이 의도한 바라면 다분히 성공적이다.


처음 등장한 사오리는 학교의 대응 방식을 갑갑해했다. 학부모의 거센 항의에도 대본에 쓰여있는 대로 대응하는 교장과 주변 교사들을 보여주면서 감독이 일본의 관료주의에 야유를 던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 특유의 유머를 기대했으나. 분위기만 계속 숙연해졌다. 그러고는 호리 선생으로 바통이 넘어간다. 그는 아이들을 살갑게 대한다. 반면에 사오리는 막무가내로 교권을 침탈한다. 교권 침해에 대한 사회적 문제 제기인가. 똑같은 사건을 두고 두 인물의 입장 차는 극명했다. 여기에 아이들까지 가세한다.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온천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빠를 둔 미나토와 아빠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요리, 둘은 친해진다. 이들에게 빅 크런치는 구원 같은 대상이며, 실제로 영화 끝에 엄청난 폭우와 해일이 밀려온다. 빅뱅 우주론에 입각한 우주 멸망 가설을 이용해서 SF로 장르 전환이 이 영화의 최종 목표인가.


네 사람의 입장도 어지러웠지만, 관점마다 전언이 달라서 풍자, 교권, SF 중 어느 쪽이 무게를 뒀는지 판단이 안 섰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서야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누구도 고의로 해를 입히려고 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이가 있다. 또한 ‘일반적인’, ‘남자가’, ‘남자다운’과 같은 표현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주려고 했단다. 내가 감독의 속뜻에 공감하는 쪽은 전자다. 가짜 뉴스를 배출하는 사람과 그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은 실존하며, 사오리, 호리 선생, 미나토 역시 미묘하게 양쪽에 다 속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상식적인 표현이 주는 폭력성에 대해서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더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아이러니하게 영화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 채, 호우가 그치고 환한 햇볕을 받은 아이 둘이 파란 숲길을 웃으며 달려간다. 어려운 영화다. 글을 쓰면 정리가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미궁이다. “우리는 이제 새로 태어난 건가.” 요리의 대사를 통해 이들의 생사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세상만이 밝은 미래가 있음을 짐작해 본다. 불과 물로 헝클어진 이 세계는 여전히 어둡다. 우리 모두가 괴물이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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