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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 나가기도 전인데

괴발자 모드 속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퇴근길 버스를 탔다. 방금까지 흐리기만 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빗방울이 창문에 맺혔다. 고속도로를 탄 이후에는 장대비가 내렸다. 땅에 발이 닿기 전 멎기를 바라며 버스에서 내렸다. 비가 한 방울씩만 내려서 우산을 안 써도 그만 이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손에 쥔 우산을 폈다. 그 순간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폭우다. 얼른 버스를 갈아타려고 정류장 안으로 숨었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이유로 우산이 소용없다. 쓰나 마나 할 정도로 비가 사선으로 퍼부었다. 주변 사람 전부 대피소로 모여들었다. 난 자연스럽게 사람들한테 둘러싸였다. 그 순간 나쁜 자동차 한 대가 물을 쏟고 갔다. 내 앞에 있는 여자분이 물세례를 받았다. 그분은 홀딱 젖어서 버스를 타고 금방 사라졌다. 금세 다른 남자분이 자리를 메꿨다. 이미 침습당한 채로. 나쁜 자동차가 나타나 다시 물을 튀고 갔다. 나는 이번에도 물세례를 피했다. 오늘 귀인을 두 번이나 만났다. 물대포를 뚫고 만난 친구는 양말과 운동화가 다 젖었다며 만나는 내내 불쾌함을 토로했다. 멀쩡한 내 양말과 신발의 촉감을 느끼며 연달아서 날 구해준 분들께 연거푸 감사드린다.


운전자는 보행자의 상황을 잘 모른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는 주행을 위한 대기 공간으로 여겨 오히려 사람이 차도로 걷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 흥건히 고인 물웅덩이를 차가 휑하고 지나가서 물세례를 받을 때도 있다. 이럴 땐 억울해서 나도 운전해야 하나 고민이 든다. 최근에는 엄마가 있는 고양시와 수원시를 주기적으로 오가야 해서 자동차를 사야 할 동기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제주도를 여행하고 싶을 때도 차가 없으면 무척 불편하다. 운전의 필요성은 계속 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면허를 따서 운전자로서의 요건은 갖췄다. 그런데 20년 넘게 운전하지 않아 이제는 시동 켤지도 모른다. 요새는 차 키를 넣는 게 아니라 버튼으로도 동작하던데, 잘 알지 못하니 큰일이다. 운전하는 데 가장 두려운 존재는 킥보드다. 천천히 움직이면 사고가 날만 한 요소는 대체로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킥보드의 동선은 좀처럼 예상할 수 없다. 남자 친구가 있었을 때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는 내 발이 되어줄 그가 없으니 직접 움직여야 한다. 근심이 쌓이기 시작하는 찰나 김훈 작가의 글이 떠올랐다. 글맛이 좋아 좋아하는 작가다.


한국 도로에서는 비싼 차가 우월적 지위를 갖는다. 소형차 운전자는 외제 차를 긁기만 해도 한 달 월급이 날아가거나 보험료가 인상된다. 반면, 값비싼 외제 차의 운전자는 100% 과실로 싼 차를 들이박더라도 아주 싼 값을 물어주거나 보험으로 처리하면 된다. 도로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동일한 과실로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찻값에 따라 배상액에 차이가 나는 이유를 글쓴이는 이해하지 못하며 짜증만 낸다.


김 작가의 칼럼 〈네거리의 짜증〉이다. 2020년 11월, 5년 전 발표된 글임에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여전히 오늘 길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운전을 한번 해볼까 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차를 사야 하는지 질문했다. 대다수 사람이 안전을 고려하면 대형차가 좋으며 특히 사고 날 때 소형차는 상대방이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초보운전인 나는 차가 크면 주차가 힘들 것 같아 경차를 생각했는데, 교통사고에서 불리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대뜸 겁부터 난다. 공적인 도로에 비싼 차를 몰고 나와서 다른 운전자들의 심리적, 공간적,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행위에 대한 책임이나 세금은 왜 없는지, 김 작가는 물었다. 나도 궁금하다. 대부분 혼자 탈 거라서 클 필요가 없는데, 일어나지도 않을 사고를 대비해서 구매 가격대를 높여야 하나 걱정이다. 그러다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회사에서 당일 캠핑이 있는 날, 사람들이 차를 몰고 왔는데 거의 외제 차였다. 저들도 비슷한 이유로 차를 택했는지 궁금했지만, 극 내향인인 나는 묻지 못했다. 비싼 차가 많아지면 결국 가장 많은 혜택을 챙기는 쪽은 보험회사 아닌가. 찻값과 보험료까지, 도로에 나가기도 전인데 걱정거리만 는다.


※ 한겨레 칼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00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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