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발자 모드 속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거울 앞 스네이프가 있다. 《해리포터》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호그와트 교수 말이다. 5:5 가르마를 하고 검정 라운드넥 반팔 티를 입은 채 정면을 응시 중이다. 잠시 후 가운이 건네진다. 까만 소복을 입고 착석한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꼬불꼬불하게, 삼각형 머리를 하고 싶어요.” 손님의 의사를 확인한 미용사는 커트보를 가져온다. 감장 예복 위에 커다란 흰 턱받이를 얹어지면, 영락없는 수도사의 품새다. 이제 엄숙히 예식을 치를 시간이다. 싹둑싹둑, 그녀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간다. 이발이 끝나면 다음은 볶을 차례다. 미용사는 그녀의 곱슬기를 걱정하며, 요즘 같은 날씨에는 반드시 부해질 거라고 경고한다. 겨울에는 괜찮은데, 습기가 많아지면 헤어스타일도 같이 승천한단다. 미용사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수도사는 괜찮다고 원안대로 요청한다. “최대한 고불고불하게 감아주세요.”
오늘의 하이라이트 1단계, 기다란 파마 봉이 그녀의 머리칼을 돌돌 감싼다. 2단계, 봉으로 빼곡히 채워진 두상 위로 비닐이 씌워진다. 김을 뿜어내는 열풍기가 머리 꼭대기에서 360도 휘휘 돈다. 3단계, “삐”하는 소리와 함께 기기의 동작이 멈추면 비닐이 벗겨지고 머리 위로 중화제가 발포된다. 그렇게 2시간 동안 버티면 마침내 헹굼의 과정에 도달한다. 거울 곁을 떠난 10여 분 남짓, 설렘과 궁금의 감정이 교차한다. 이 순간 그녀는 스네이프도, 수도사도 아니다. 과연 그녀는 무엇이 될까? “자리로 돌아가서 앉으시겠어요?” 결전의 순간이다. 성큼성큼 제자리를 찾아간다. 맙소사, 스네이프는 확실히 사라졌다. 대신 호박고구마 나문희 여사가 왔다. 미용사는 고객의 요구를 정확하게 들어주었다. 확실히 변신했다. 좋든 아니든. 아직 출근하려면 이틀 남았으니, 방책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하다.
끝내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나문희 여사가 되어 출근하자마자 에러 난 코드를 붙들었다. 그리고선 하루 종일 어르고 달랬다. 내일은 외근해서 너를 볼 시간이 없는데, 혼자 두게 해서 삐졌냐며 타일렀다. 이렇게 저렇게 구동시켜 봤다. 제발 좀 돌아라. 동작하다 멈추면 나도 답이 없다. 구글링도 하고 ChatGPT도 찾고 옆 사람한테도 물어봤는데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 회의 들어가기 10분 전, 오타를 발견했다. 역시 로그는 거짓말을 안 한다. 컴퓨터에서 로그란, 코드가 수행되면서 오류가 발생하다 죽었을 때 유서 같은 글이다. 그 문장을 판독하면 사건의 단서를 살필 수 있다. 성질 급한 나는 보지도 않고 그대로 긁어서 검색창에 붙였다. 전후 상황을 모르는 Google 씨와 ChatGPT 씨는 엄한 소리만 했다. 그래, 내 맘을 알 턱이 있니. 가뜩이나 부풀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니, 미용사의 예언대로 머리털은 더욱 부해졌다.
오타를 고치니 전체 코드의 30%는 진전이 되었다. 그리고선 형태가 안 맞다고 또 멈춰 섰다. 똑같은 데이터를 넣었는데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내 처지이면 믿을 수 있겠냐고 아무리 타박해도 끄떡없다. 퇴근 시간은 다가오는데 모니터는 온통 뻘건 유서로 가득 찼다. 집에 가기 40분 전, 데이터가 교묘하게 다름을 찾았다. 컴퓨터는 정직했다. 거짓말은 사람만 한다. 컴퓨터와 신뢰를 두고 작업해야 하지만, 경청하지 않는 나는 막무가내로 일한다. 끝내고 집에 가야 외부 일정이 편한데 마음이 급하다. 5분 남았다, 돌아라. 갑자기 매의 눈으로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 에러가 날 수 있는 구간을 발견해서 미리 고치고 재실행한다. 테스트까지 남은 시간은 3분, 성공이다. 덕분에 내일은 평화로울 것이다. 역시 무슨 일이든 임박해야 해결된다. 시험도 코딩도 글쓰기까지 벼락치기. 스네이프였다 나문희 여사로 둔갑한 나는 비로소 벼락을 관장하는 제우스의 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