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유가 있더라 고요
청소년 쉼터에 내가 어느 정도 적응했을 무렵, 태현은 복무를 다 마치지 못하고 제대했다. 이는 기록으로 남아 앞으로의 취직에도 적지 않은 방해가 됐을 텐데, 태현이가 쉼터로 돌아온 건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대체적으로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조직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이론으론 폭력의 피해자가 상급자를 향해 투사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이 또한 말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더해 나의 생각을 더해보려고 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피해자들이 갖고 있는 극단적인 피아식별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 쉼터에 있다 보면 쉼터생들이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치 야생에서 동물들이 위협이 될 개체에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렇게 적을 구분 짓는 것과 동시에 쉼터생들은 놀라울 만큼 허술하기도 하다. 가족애에 상당히 굶주려 있는 탓인지, 한 번 믿음을 준 타인에게 금전적으로 갈취당하는 일도 빈번하다. 심각한 경우에는 성적인 폭력으로까지 발전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야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이 된 인간관계 상호작용의 총합이다.
그렇기에 상대를 잠재적 아군과 적군으로 신경 쓰는 건, 지나치게 심력을 잡아먹는 일이다. 특히나 쉼터생들은 정신병으로 발전하기 쉬운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에 대한 취약성 탓에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이유로 태현은 우울증 및 신체 자해로 의가사 제대했다. 외부로 발산되지 않는 분노는 내부로 향한다는 말이 있듯이 태현은 스스로를 망쳤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 불합리를 공격으로 받아들이면서 무너졌다. 군대 후임으로 만난 엘리트 출신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쓰러졌다. 나는 태현이가 한 말을 잊지 못한다. 태현이 말고도 자해를 하는 동생이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가 부럽다. 이 자해라는 게 혈관에 가까울수록 죽고 싶다는 뜻이고, 처럼 혈관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살고 싶다는 뜻이야.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자해를 하는 거지.’
태현의 동맥에는 상처가 나날이 늘어나만 갔다. 그렇게 나는 자해의 여러 의미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