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측정할 수 없어야 합니다
쉼터에는 속칭 ‘실세’라는 게 있다. 나이가 가장 많던, 리더십이 있다는 이유든, 쉼터생들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사회 복지사님들과 협력하며 무게 중심을 잡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쉼터의 실세였던 ‘태현’은 자기희생적인 친구였다.
솔직히 생긴 건 많이 무섭게 생긴 친구였는데, 설거지가 있으면 늘 혼자서 처리했다. 식사 후 뒷정리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들어온 쉼터생이 있으면 직접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대우를 정했다.
다행히도 나는 태현의 기준에 합격점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히 친해지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동갑내기라고는 하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만큼 몰려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태현은 어떠한 이유로 친부모끼리 이혼하여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태현의 어머니는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태현을 향해 폭력으로 투사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재혼 후 만난 양아버지 또한 조폭으로 손찌검을 하기 일쑤였다.
동생들을 지키면 지킬수록 태현은 피폐해져만 갔고, 살기 위해 도망쳤다. 처음에는 청소년 쉼터의 존재를 몰라서 건물 보일러실 옆에서 잠을 청한 적도 있다고. 다행히 소문을 듣고 온 사회복지사들의 도움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청소년 쉼터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 중에서 재수가 없는 것들을 뽑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두 종류를 선택하겠다. 하나는 부모가 있어서 불행한 친구들. 다른 한쪽은 부모가 있어서 불행한 친구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롤모델의 부재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테고, 생계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심지어 가장 아끼고 소중해야 할 존재에 대한 원망과 고달픈 인생에 대한 원한이 합쳐져 부모를 증오하게 되고,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 혐오하게 되는 일련의 굴레까지 존재한다.
나는 감히 양측 중 어느 한쪽이 더 불행한지 판단하지 못한다. 가장 믿었던 존재에게 배신을 당했건, 그 대상이 애초에 부재했건 간에 둘 다 슬픈 이야기니까 말이다.
하지만 국가에게 이건 너무나 간단한 문제였다. 국가가 보기에 부모 없는 이들이 부모 있는 이들보다 더 불행했으므로 우리는 국방의 의무가 주어졌다. 하기사 부모 없는 아이들도 조건부로 끌고 가는 게 국가란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나는 그 믿음직한 태현이 설마 군대에서 그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다. 태현이 이보다 더 불행해질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