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쉼터에 입소하다

무섭지 않아요

by 대오

늘 술에 절어있던 아버지와 내 편이 되어 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지쳐 기나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시작한 독립은 아름답지 않았고 고달팠지만 죽을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나 움츠려 있었던 것만큼은 기억난다. 반에서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아이. 조별 과제에서 인원수가 많으면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아이가 나였다. 그나마 내가 기억을 명확히 하는 시절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늘 술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아버지와 생활고로 어깨가 무거운 어머니는 매일 같이 싸움을 반복했고, 동생은 울기 바빴다. 나는 동생이 우는 게 너무나 싫어 동생을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언제는 동생을 그만 울리라고 화를 냈다가 저 둘은 부모에게 버릇없이 군다고 성을 내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였지만, 가정은 대화를 통해서 돌아가지 않고,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일방적으로 압력을 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수염을 관리하는 법도 몰랐고, 아침마다 머리를 못 감고 나가기 일쑤였다. 친구들은 꾀쬐쬐한 나를 무시했고, 범죄자 몽타주와 닮았다며 나를 조롱하지 못해 안달이 난 친구도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상당히 무관심했는데, 술에 먹은 행인에게 폭행을 당해도 CCTV를 통해 범인을 잡는 걸 도와달라는 내 요청을 무시하고 예능 프로그램이나 보는 형편 좋은 인간이었다. 어느 날, 무슨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괴롭힘을 받다가 울음을 터뜨린 친구를 돕기 위해 나선 일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내 친구가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불량배에게 뺨을 맞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불량배의 손을 잡았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며 손을 놓으라고 하는 협박에 맞잡은 손을 놓았다. 그 때, 일은 내게 트라우마가 되고. 나는 언젠간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다면 꼭 도와주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울음을 터뜨린 친구를 돕는 과정에서 나는 목에 피를 흘릴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고, 결국 교내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다시는 이런 일로 자신을 부르지 말라고 일갈했다. 내 안에 오랫동안 타오를 작은 분노가 심어진 순간이었다. 내가 도운 친구는 내가 폭행당할 당시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반쯤은 가해자를 옹호했다. 어머니는 어차피 처벌되지 않을 것이라며 잘 합의해서 처리하자고 했다. 교사들은 이 일을 덮으려고 했다. 이 일로 인해 악에 찬 나는 미친 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도,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전부 다 내가 부족해서 인 것만 같았다. 적당히 남들을 따라갈 정도로만 공부를 했던 나에게 자발적인 공부란 미친 듯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성과를 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에 선생님에게 공부를 잘 하게 되니 교사도 학생들도 그제야 내가 있는 걸 알아준다고 하자, 아무리 교사라도 그 많은 학생들을 다 인식하는 건 무리라는 답변을 들었다. 적어도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이후로도 나는 내 존재 가치를 학업에서 찾으며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 공부는 잘 하는 아이. 공부나마 잘 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수능 때 컨디션 조절 실패로 좋지 못한 성적을 받으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교를 선택해 들어갔다.

대학교는 실망스러웠다. 지방에서 나름대로 알아주고, 입결 대비 취업이 잘 된다고 할 지라도, 서울 출신의 엘리트 교수들은 학생들을 바보 취급하기 일쑤였다.

나는 욕심이 들었다. ‘한 번 실패한 걸로 인생이 결정되는 건 너무하잖아? 수능 때는 실수한 거니까... 재수를 준비해보자.’ 집안은 기숙 학교나 재수 학원을 지원해줄 만큼 넉넉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나는 일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을 내린다. 집으로 돌아가 독학으로 재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로 인해 어느 정도 부모에게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이 된 나에게 아버지란 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결국 폭발하여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아버지와 말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당신들이 나를 만들었잖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할 거면 다채 왜 나를 태어나게 했나? 나는 대체 왜 이렇게 볼품없고 자신감 없게 된 건가? 사랑 받을 만한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보이는 건 형편 없는 사람 하나다.

나는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를 토해냈고, 뺨을 맞았다. 집에서 뛰쳐나간 나는 조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가족 일은 좋게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무관심에 다시 한 번 방치 받았다. 가정 폭력과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무작정 뛰어나와 원룸을 잡게 되었다. 본래라면 아르바이트를 진전하며 돈을 모아 대학교로 복학했어야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사. 당시의 나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다리가 대체 왜 이러지? 그리고 허리에 왜 감각이 옅지? 나는 덜컥 겁이 나 어머니에게 정밀 검사를 위한 병원비를 요청했지만 보기 좋게 방치당하고 치료를 위한 골드 타임을 놓쳤다. 훗날에야 허리 디스크였다는 게 밝혀졌었지만, 당시에는 이유도 모르고 나을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전의 나는 독학 재수를 준비하며 10시간 넘게 장시간 앉아 있기 일쑤였었는데, 이것이 원인이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거기에다가 원룸의 메트릭스를 살 돈이 없어 이불을 펴고 잤던 것도 원인이었겠지.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이 내게 피해가 오다니. 인생이란 되는 게 없다고 하지만 너무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런 허리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청소년 쉼터를 다루는 만화를 접하게 되었다(나는 평소에도 만화를 즐겨 읽는다).

해당 만화는 여성 가출 청소년인 작가가 청소년 쉼터에 입소하여 고군분투한 일대기를 담고 있었다. 해당 만화를 읽으며 나는 청소년 쉼터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다. 만화를 읽기 전에는 쉼터라는 복지시설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만화를 통해 접하다니 살짝 신기한 감상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나의 사정을 차분히 a4 용지에 정리했다. 말을 절거나 실수해서 청소년 쉼터에 입소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들어서였다. 당시의 나는 총 3군데의 단기 남자 청소년 쉼터에 전화를 했었다. 그 중에 면담을 받으라고 한 쉼터는 오로지 한 군데로, 나머지 두 군데의 인상은 썩 좋지 않았었다. 한 곳은 내가 실수로 말을 절었을 때, 이를 지적하며 무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청소년 쉼터가 질이 좋지 않은 곳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기에 면담을 보러 갔었다.

당시 내 면담을 진행했던 선생님은 주말 담당 선생님으로 내게 청소년 쉼터의 입소 원칙을 설명해주었다. 최우선 1순위 쉼터 입소 기준은 나이가 어릴 것. 대략 우리가 생각하는 중학교~고등학교(14세~19세) 정도의 아이들이라고 한다. 나는 22살로 나이가 조금 많지만 쉼터 내에 인원 수용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두 번째 규칙은 절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도와 폭력은 금지라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이 발각되었을 시에는 무조건적인 퇴소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세 번째로는 쉼터 입소가 이루어질 시 부모에게 연락이 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이 마지막 세 번째 규칙에 당황했다. 가정 폭력과 해체를 경험하고 쉼터에 입소하려는 아이들에게 부모에게 연락이 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쉼터 선생님도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집을 나온 피보호자의 신원을 보호자가 알아야 하는 건 법이라고 어쩔 수 없다 했다(민법 제 914조). 이는 보호자의 동의를 구함이 아니라 해당 청소년을 안전하게 보호 중임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했다. 물론 보호자가 멋대로 찾아왔을 때 만나지 않게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건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기관도 바보가 아니기에 가정 폭력 피해자와 성인의 경우 연락 없이 지켜주기도 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여성가족부 정책 브리핑을 보면 해당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가출 청소년이라면 지체 없이 청소년 쉼터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추천한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청소년 쉼터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선생님과 상담을 해야 한다. 이는 정말 도움이 절실한 아이에게 복지 수혜를 베풀기 위해서였고, 나는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이 그러셨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부모 같지 않은 부모를 정말로 많이 듣게 된다.’

이 말을 듣고 난 뒤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내가 평생을 살면서 들었던 말들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 '부모 자식 관계는 끊어낼 수 없다'는 헛소리들이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내 아픔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내 사정을 마음껏 슬퍼해도 된다는 자격을 증명받은 것 같았다.

나는 다행히 청소년 쉼터에 입소할 수 있었다. 원룸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빼고 커리어 하나에 담길 정도만 남기고 모두 버렸다. 본격적인 쉼터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처음으로 쉼터에 입소했을 때, 많이 긴장되었던 건 사실이다. 불량한 아이들이 있으면 어쩌지?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따위의 걱정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기우로 밝혀졌는데, 알고 보니 청소년 쉼터에는 자체적으로 지켜야 할 규율 등이 있더라. 이는 쉼터생 간의 폭력을 방지하고, 더 장기적이고 안전한 쉼터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특히 청소년 쉼터에는 기본적으로 ‘선생님’이 상주한다. 아침에는 사회복지사 분들이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저녁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구조였다. 따라서 문제의 여지가 있는 아이들의 행동을 예방하고 사건이 발생했을 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 있는 셈이었다. 쉼터에는 온갖 인간군상이 모여든다. 평범하게 삐뚤어진 사람도 있지만 좋은 척하고 타인을 착취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쉼터생들은 나름의 벽을 치고 상대를 대한다. 이 사람과 친해져도 내가 상처받지 않을까, 혹시라도 상대방이 나쁜 마음을 먹지는 않을까를 걱정하는 것이다.

우선 내가 쉼터에 입소한 날은 겨울 저녁이였다. 내가 쉼터에 처음 입장했을 때는 쉼터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내가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모두가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솔직히 쭈뼛거리고 많이 당황스러웠다. 쉼터 당직 선생님은 나를 소개하며 인사를 시켰고, 나는 너무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민수'라는 아이가 나에게 장난스럽게 농담을 걸면서 주위를 웃게 만들어서 분위기를 한결 편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저녁 식사를 했냐고 물었고, 나는 아직 못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시더니 점심 때 먹다 남은 밥과 반찬을 데워주셨다.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고, 선생님이 굉장히 짠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시던 걸 기억한다.

쉼터는 가정집을 개조한 형태로 사무실 하나, 공부방 하나, 거실, 발코니, 당직 선생님 수면실 하나, 화장실 한 개, 체력 단련실 하나, 부엌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청소년 쉼터보다는 많이 노후화되고 좁았다. 다른 쉼터는 개인실은 아니어도 아이들끼리 4인실, 8인실 등 모어서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거실과 안방 그리고 체력 단련실에 매트릭스를 깔고 자야했다. 당직 선생님을 위한 당직실도 없어서 사무실에서 불을 키고 당직을 서셨다. 나는 선생님에게 쉼터에서 지켜야 할 규칙(7시 기상, 10시 취침)을 안내받았다. 학교 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침 7시에서는 모두가 기상을 해야했고, 너무 늦게 잠들지 않도록 모두가 10시에는 취침을 해야 했다. 조금 특이한 것은 휴대폰을 저녁 6시 이후로 받을 수 있었던 건데, 이건 나중에 설명할 이야기지만 쉼터생 중에 휴대폰으로 인해 범죄와 사기에 빠져든 이가 있어서 시행했던 규칙이었다. 당연히 쉼터생들 대다수가 지키기 싫어했고, 너무 규칙이 빡빡하다며 다른 쉼터로 떠난 이들도 있었다.

참고로 쉼터에서는 필요하다면 기본 속옷과 의복을 제공해주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노숙하다가 오는 친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개인 사물함과 개인 자물쇠를 발급받았다. 본격적인 쉼터 생활의 시작이었다.